총자산 7위에 시총 4위…시장이 인정한 '미래'삼성 빅딜·대우조선 인수…글로벌 '방산 제국'김승연 소프트파워·김동관 전략…"K-승계 모델"석유화학·태양광·금융…질주 뒤에 남은 과제들'맹자'는 "수유지혜 불여승세(雖有智惠 不如乘勢)"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지혜가 있어도 시류를 타는 것만 못하다는 뜻입니다. 요즘 재계에서 이 말을 가장 실감하게 하는 기업을 꼽으라면 단연 한화그룹입니다. 한화는 공정거래위원회 기준 총자산으로는 재계 7위에 머물러 있지만 주식시장이 매긴 시가총액 기준으로는 삼성·SK·현대자동차 다음인 4위까지 올라섰습니다. 오랫동안 재계 상위권을 지켜온 LG·포스코·롯데를 앞질렀습니다. 최근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등 중동 정세 불안으로 방산주가 급등한 영향이 큽니다.주가 순위라는 것은 언제든 바뀔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한화그룹 계열사들의 질주는 단지 일시적 현상으로만 봐서는 안 됩니다. 증시는 과거 성적표인 '자산'보다 미래 먹거리인 '성장 엔진'에 반응한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산 순위가 기업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준다면 시가총액은 기업의 '미래'를 보여주는 지표입니다.지난해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한화그룹의 총자산은 120조 원 수준이지만 현재 시장이 매긴 기업가치, 즉 시가총액은 180조 원 안팎입니다. 현재의 자산보다 앞으로 벌어들일 가치가 더 크다고 시장이 인정한 것입니다. 이 변화는 단순한 주가 상승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특히 자산 총액 기준 7위인 한화가 4위인 LG를 추월한 것은 오랫동안 IT와 가전 중심이었던 대한민국 산업의 축이 방산과 에너지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입니다.한화의 약진을 만든 가장 큰 힘은 산업 구조의 변화입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한화는 화약과 석유화학, 금융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내수 제조기업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화의 중심 산업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핵심에는 한화에어로스페이스와 한화오션이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이란에서의 전쟁과 유럽의 재무장 속에서 K-방산 수출이 급증했고, LNG선과 군함 수요 증가로 조선업도 다시 상승 사이클에 올라섰습니다. 한화는 지상 무기와 해양 방산, 우주 항공을 연결하는 통합 방산 체계를 구축하며 글로벌 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습니다.방산·조선이 만든 한화의 재평가장남 김동관 부회장이 그리는 그림은 미국의 록히드마틴과 같은 글로벌 방산 기업입니다. 육·해·공을 넘어 우주까지 연결되는 방산 생태계를 구축해 세계적인 방산 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구상입니다. 이 구조를 만든 결정적 사건은 2015년 삼성과의 이른바 '빅딜'이었습니다. 당시 한화는 삼성테크윈, 삼성탈레스, 삼성종합화학, 삼성토탈 등을 인수했습니다.그때만 해도 방산 사업이 지금처럼 뜰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당시 방산은 철저히 내수 중심 산업이었고 정부 상대 비즈니스이다 보니 마진도 박했습니다. 당연히 삼성 입장에서는 비핵심 사업이었고, 시장에서도 한화의 도전에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은 10년 뒤 한화를 글로벌 방산 기업으로 탈바꿈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여기에 2023년 대우조선해양 인수까지 더해지면서 한화는 육·해·공을 아우르는 방위산업 생태계를 완성했습니다.이 같은 변화의 중심에는 당연히 김승연 회장의 리더십이 있습니다. 김 회장의 리더십은 흔히 '신용과 의리', 그리고 '뚝심'으로 요약됩니다. IMF 외환위기 직후인 2002년 대한생명을 인수하고, 10여 년 뒤 삼성 방산 사업을 인수한 결정은 당시만 해도 무리한 선택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김 회장은 한 번 선택한 사업은 쉽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였습니다. 지금의 한화에어로스페이스와 한화시스템 등은 모두 그때의 선택이 낳은 결과입니다.동시에 김 회장은 글로벌 정·재계 네트워크를 활용해 해외 사업의 물꼬를 트는 '소프트 파워' 리더십을 보여주었습니다. 김승연 회장은 그룹의 상징적 지주이면서 동시에 아들들에게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그 결과 한화는 아버지는 큰 그림을, 아들들은 실무 지휘를 맡는 이상적인 '2~3세 공존 경영'을 펼치고 있습니다. 재계에서 흔치 않은 모델입니다.이러한 유산을 이어받은 인물이 장남 김동관 부회장입니다. 김 부회장은 부친의 결단형 리더십에 전략적 설계와 실행력을 더했습니다. 흩어져 있던 방산 사업을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중심으로 통합하고,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통해 해양 방산까지 연결했습니다. 재계에서는 이를 두고 "김승연이 방향을 잡았다면 김동관은 그 방향을 현실로 만든 전략가"라는 평가가 나옵니다.김승연 리더십과 가족경영 순기능 극대화한화의 또 다른 특징은 비교적 잡음이 적었던 승계 과정입니다. 한국 대기업의 승계는 대부분 갈등과 논란을 동반했습니다. 삼성은 승계 과정에서 오랜 기간 사법 리스크에 시달렸고, 롯데는 이른바 '형제의 난'을 겪었습니다. 인화의 모델로 평가받던 LG그룹조차 최근 상속 분쟁이 발생했습니다.반면 한화는 장남 중심 경영 아래 3형제 분업 구조를 정착시켰습니다. 김동관 부회장은 방산과 에너지를, 차남 김동원 사장은 금융을, 삼남 김동선 부사장은 로봇 등 테크 사업과 호텔·식품 등 라이프 사업을 맡고 있습니다. 김승연 회장은 그룹의 큰 전략과 M&A를 결정하고 실질적인 사업 운영은 세 아들이 맡는 구조입니다. 재계에서는 이를 두고 'K-승계 모델의 진화형'이라는 평가도 나옵니다.특히 주목할 점은 한화가 승계 리스크를 오히려 증시의 호재로 바꾸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그룹들이 겪었던 형제 분쟁이나 사법 리스크, 상속 분쟁 없이 승계가 진행되면서 시장의 불확실성이 줄어들고 주가가 상승했습니다. 단적으로 지난해 김승연 회장의 3형제에 대한 ㈜한화 지분 증여, 올해 초 ㈜한화의 인적 분할 때 시장은 긍정적으로 반응했고 주가 상승으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한화의 약진은 오너가의 단합된 의사결정 속도가 전문 경영인 체제보다 빠르고 과감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가족 경영'의 순기능을 극대화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그렇다고 한화의 질주에 샴페인을 터뜨리기에는 너무 이릅니다. 아직 갈 길이 멉니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단연 석유화학입니다. 과거 그룹의 캐시카우였던 석유화학 부문은 중국발 공급 과잉으로 수익성이 급격히 악화됐습니다. 핵심 계열사로 DL과의 합작사인 여천NCC는 실적 악화로 일부 공장 폐쇄를 결정할 만큼 상황이 심각합니다.질주 뒤에도 여전히 남는 과제들잘 나가는 방산 산업도 구조적으로 한계가 있습니다. 방산은 수주 잔고가 쌓이는 사업이지만 실제 현금이 들어오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수주 규모는 커 보이지만 운전자금 부담도 커 재무구조를 압박하는 사업입니다. 여기에 정치 상황에 따라 수요가 크게 변하는 리스크도 존재합니다. K-방산의 성장은 우크라이나와 이란에서의 전쟁, 미·중 갈등이라는 특수 상황 덕분이기도 합니다. 세계 정세가 급변하거나 주요 무기 수입국들의 정권이 교체되면 수주가 급격히 떨어질 수 있습니다. 폴란드 등 특정 국가 중심에서 벗어나 수출국 다변화가 절실합니다.태양광 사업은 오랜 숙제입니다. 한화솔루션의 태양광 사업은 미국 내 생산 세액공제(AMPC) 혜택 등에 크게 의존하고 있어 대선 결과나 정책 변화에 매우 취약합니다. 금융 사업은 꾸준하지만 확실한 돌파구가 없습니다. 차남 김동원 사장이 맡은 금융 계열은 인구 감소와 보험 시장 포화, 규제 산업이라는 구조적 한계에 직면해 있습니다. 금융지주사 체제 전환이나 계열 분리 역시 쉽지 않은 과제입니다. 아직은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글로벌 방산 산업 호황에 힘입어 한화가 시가총액 기준 재계 4위로 도약했지만 방심하기에는 이릅니다. LG는 전고체 배터리와 ESS(에너지저장장치), AI 사업을 중심으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준비하고 있고, 포스코는 철강을 넘어 리튬과 니켈 등 글로벌 소재 기업으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시가총액 순위는 어디까지나 현재 산업 사이클이 만들어낸 결과일 뿐이며 하루아침에 바뀔 수도 있습니다.결국 한화의 미래는 전통 산업의 퇴장과 신산업의 안착을 얼마나 매끄럽게 연결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화학과 금융 같은 전통 산업을 어떻게 재편할 것인지, 방산과 우주, AI 기반 산업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성장시킬 것인지가 향후 50년 한화의 운명을 좌우할 것입니다. '맹자'는 시류를 타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시류를 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방산 호황이라는 큰 기회를 지속 가능한 산업 경쟁력으로 바꾸는 것, 그것이 바로 한화가 이제부터 풀어야 할 진짜 시험입니다.
[박종면칼럼] '시총 4위' 한화의 질주, 이제부터 진짜 시험
LG는 전고체 배터리와 ESS(에너지저장장치), AI 사업을 중심으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준비하고 있고, 포스코는... 화학과 금융 같은 전통 산업을 어떻게 재편할 것인지, 방산과 우주, AI 기반 산업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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