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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바닷길 막혔는데…그 회사는 왜 웃을까 [경영전략노트]

장면 1. “세계화는 끝났다.” 호세 무뇨스 현대차 사장이 최근 외신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이란 전쟁을 언급하며 생산 차질을 막으려 노력했으나 지금처럼 어려운 적이 없었다고 털어놨다.

바닷길 막혔는데…그 회사는 왜 웃을까 [경영전략노트]

‘저스트 인 케이스(JIC)’를 아시나요

장면 1. “세계화는 끝났다.” 호세 무뇨스 현대차 사장이 최근 외신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이란 전쟁을 언급하며 생산 차질을 막으려 노력했으나 지금처럼 어려운 적이 없었다고 털어놨다.

올해 초 현대차 유럽 공장은 부품 수급을 두고 위기를 맞았다. 아시아와 유럽 간 컨테이너 화물 길목인 홍해와 수에즈 운하가 막혀서다. 자동차 부품이나 화장품 부자재 등 일반 화물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넘어갈 때 이용하는 관문은 예멘 앞바다인 홍해를 거쳐 수에즈 운하로 이어진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발발 이후 예멘 친이란 반군 후티가 홍해 길목에서 민간 선박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글로벌 해운사가 수에즈 운하 통과를 포기하고 아프리카 희망봉으로 우회하며 물류 소요 시간은 평소보다 2주 이상 길어졌다.

부품이 제때 도착하지 않아 유럽 공장 생산 라인이 멈춘다면 신차 출시 일정은 어긋난다. 현대자동차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현지 물류 창고에 쌓아두는 부품 재고량을 늘렸다. 동시에 아시아에서 가져오던 부품 비중을 줄이고 체코·튀르키예 등 유럽 공장 인근 현지 부품사로부터 구매량을 늘려 공급망을 다변화했다.

장면 2. 지정학적 갈등이 불러온 파장은 한국 화장품 산업, 이른바 K뷰티 생태계 풍경도 바꿔놨다. 화장품은 내용물 배합부터 플라스틱 용기·종이 상자·펌프 등 전 세계를 넘나드는 복잡한 공급망을 거쳐 완성된다. 중동발 해상 물류망 불안으로 필수 부자재 수급이 미뤄지자 시장은 누가 부자재를 미리 확보해뒀는가를 기준으로 재편되는 분위기다. 당장 필요한 만큼만 소량으로 부자재를 주문하며 버티던 중소형 브랜드는 펌프 하나를 구하지 못해 공장을 멈춰 세웠다. 반면 분기당 수천만개 단위 대규모 ‘선(先)발주’를 진행한 닥터멜락신·메디큐브·스킨천사 등 자본력 있는 브랜드는 물류 대란 속에서도 시장에 제품을 적시에 공급하고 있다. 반면 신흥 브랜드 소비자는 물량이 넉넉한 선두 브랜드로 발길을 돌리는 분위기다.

현대차와 K뷰티 선두 브랜드 대처법에는 공통점이 있다. 생산에 당장 필요하지 않더라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창고에 여유분 재고를 비축해뒀다는 점이다. 경영학에서는 이를 저스트 인 케이스(JIC·Just in Case) 전략이라 부른다. JIC는 불확실성에 대비, 안전 재고(Safety Stock)를 의도적으로 비축하는 ‘푸시(Push) 기반’의 전략이다. 과거의 수요 데이터와 시장의 트렌드를 바탕으로 미래 수요를 선제적으로 예측하고, 당장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은 원자재나 완성품을 공장과 물류센터에 밀어넣어(Push) 쌓아둔다는 개념이다.

이 전략이 최우선으로 삼는 가치는 비용 절감이 아니라 ‘공급망의 끊김 없는 연속성’이다. JIC 전략을 충실히 이행하는 기업은 블랙스완(Black Swan)으로 불리는 예측 불가능한 재난이나 글로벌 물류 대란이 발생하더라도, 창고에 비축해둔 완충 재고(Buffer)를 활용해 고객과의 납기 약속을 지키고 생산 라인을 가동할 수 있다.

이 시점에 왜 뜨나

중동 전쟁 등 불확실성 속출

수십년간 글로벌 경제 모범 답안으로 불린 전략은 ‘저스트 인 타임(JIT·Just in Time)’이었다. 토요타자동차의 성공 전략을 설명할 때 단골로 따라나오는 개념이다. JIT는 필요한 시점에 필요한 만큼만 부품을 가져오는 방식이다. 고객 주문이 들어오면 후방 공급망에서 부품을 생산 라인으로 끌어온다. 기업은 창고에 잠자는 재고가 없으니 보관 비용을 아끼고 아낀 돈을 연구개발·마케팅에 투자해 자금을 효율 높게 굴릴 수 있다. 하지만 JIT는 지구 반대편에서 예기치 못한 파업·화재가 발생해 부품 조달이 끊기면 전 세계 공장 라인이 도미노처럼 멈추는 약점을 안는다.

반면 JIC는 비용 절감보다 공급망이 끊기지 않는 데 무게를 둔다. 매달 돈을 내더라도 사고 났을 때를 대비해 보험에 가입하는 것과 같다. 원자재 가격이 오르거나 물류가 막히는 돌발 상황에서도 고객과 납기 약속을 지키고 유연하게 대처할 방파제 역할을 한다.

수십년간 이어진 JIT 철학이 저물고 비효율로 보이던 JIC가 대세로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딛고 있는 경영 환경 곳곳에 균열이 생겼기 때문이다.

과거 인건비가 저렴한 곳에 공장을 짓던 기조는 무역 제재와 관세 장벽 부활로 무너졌다. 기업은 수출길 단절이나 세금 부과에 대비해 재고를 선제적으로 비축한다. 전자기기 생산이 밀집된 동아시아 지역에 잦아진 자연재해도 완충 재고 확보를 강제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기술 기업이 AI 데이터센터에 대규모 자본을 투입하며 핵심 부품 수요마저 폭발하는 추세다. 부품 부족으로 수십조원 규모 프로젝트가 미뤄지는 사태를 막고자 가격 불문 물량부터 확보하는 방식이 시장 규칙으로 자리 잡고 있다.

반도체도 속속 도입

미래 선점 위해 ‘쩐의 전쟁’

이런 산업 파도를 맞이하며 JIC 전략은 창고에 물건을 쌓아두는 것을 넘어 생산 인프라 자체를 미리 갖춰두는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AI 반도체 시장을 이끄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 행보가 대표 사례다. 반도체 공급 부족이 길어질 것으로 예상되자 고객사는 당장 필요한 물량을 선점하는 데 열을 올린다. 이를 위해 삼성전자는 올해 한 해에만 시설 투자·연구개발에 110조원 이상을 투입하며 평택캠퍼스 P4 공장을 일찍 가동하고 수요가 구체화되지 않은 P5 핵심 설비 공사까지 동시 진행하고 있다. 미래 주문을 대비, 공장과 생산 능력 자체를 완충 재고로 비축해두는 셈이다. SK하이닉스 역시 기초 재료인 웨이퍼 조달에 4년 이상 걸린다는 점을 고려해 수년 앞을 내다보고 웨이퍼를 대량 확보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유통 산업에서도 JIC 모델은 힘을 발휘한다. 아마존이 잉여 자본을 클라우드·AI 기술에 쏟아부을 때 월마트는 미국 전역에 퍼진 매장을 JIC 창고로 활용하는 옴니채널 전략을 다듬었다. 매장에 재고를 비축해 소비자가 언제든 물건을 가져가거나 짧은 시간 안에 배송받을 환경을 만들었다. 매장에 물건을 많이 쌓아두면 재무 부담이 되나 이 재고가 온라인 주문을 빠르게 소화하는 전진 기지 역할을 해 전자상거래 매출을 끌어올리는 동력이 됐다.

현대차는 공급망 다변화 외에 JIC 전략으로 위기에 맞서고 있다. (연합뉴스)

과제는 없나

물량 확보하려다 재무 부담

JIC 전략을 도입할 때 고려할 점은 뭘까. 재고를 늘리다 보면 재무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 일순위로 꼽힌다. 자본이 원자재 형태로 창고에 쌓여 있는 동안 기업은 이 자금을 유망한 스타트업에 투자하거나 신규 설비를 늘리는 데 쓸 기회를 잃을 수 있다. 임대료, 냉난방비 등 유지비용이 꾸준히 빠져나가는 점도 부담 요인이다.

고금리 환경도 변수다. 삼일PwC경영연구원에 따르면 글로벌 경제가 회복세를 보이나 과거 같은 제로 금리 시대 복귀는 쉽지 않다. 공급망을 방어하려다 금융 비용이 더 커질 수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비축해둔 물량이 가치를 잃을 위험성도 있다. 스마트폰 부품이나 의류처럼 기술 발전과 유행 변화 속도가 빠른 산업에서는 이 문제가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노정석 사이먼쿠처코리아 대표는 “단순한 재고 비축은 기업 수익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며 “부품 조달 기간과 수요 변동성을 분석해 JIT와 JIC 장점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전략을 도입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구하기 쉬운 범용 자재는 필요한 만큼만 주문하는 JIT 방식을, 조달에 긴 시간이 걸리는 핵심 자재는 비축하는 JIC 방식을 교차 적용하는 식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생산 기지를 나누고 부품 공급 업체를 분산하는 다변화 작업으로 위기에 대응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수호 기자 park.suho@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56호(2026.04.20~04.28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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