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지는 전력 수요에 송전망 확충 불가피
곳곳서 데이터센터·전력 인프라 갈등 조짐
“입지 선정부터 주민 참여 보장해야”
송전탑은 섰지만 공동체 상처는 여전
밀양시 상동면 고정마을에 사는 안병수 씨가 집에서 보이는 송전탑을 가리키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최은주 기자
밀양시 상동면 고정마을에 사는 안병수(77) 씨 집에서는 114·115번 송전탑이 보인다. 집과 송전탑 사이 거리는 약 380m다. 김해에서 이곳으로 이주한 지 올해로 22년째인 안 씨는 밀양 송전탑 건설 계획이 알려진 초기부터 지금까지 반대 입장을 이어오고 있다. ▶ 관련기사 11면
그는 2006년 상동면대책위원장, 2007년 밀양시대책위원회 대외협력국장을 지냈다. 국민권익위원회의 현장조정으로 2010년 1월부터 6월까지 ‘밀양 송전탑 갈등조정위원회’에도 참여했다. 초고압 송전선로 건설이라는 대규모 국책사업이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인물이다.
안 씨에게 당시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다. 송전선로가 마을을 지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그는 주민들과 함께 이미 송전탑이 들어선 다른 지역을 직접 찾아다녔다. 강원 평창과 충남 당진·서산 등을 찾아 송전선로 주변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안 씨는 “내가 전자파 피해가 있다, 없다를 책임지고 말할 수는 없으니 현지에 가서 주민들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고 했다”며 “1인당 5만 원씩 돈을 걷어 관광버스 두 대를 빌려 다른 지역을 찾아다녔다”고 말했다.
그곳에서 만난 주민들은 송전탑이 들어오기 전에 막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안 씨는 “주민들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이건 죽기 살기로 막아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밀양 송전탑 갈등’은 부산시 기장군 신고리 원전에서 생산한 전력을 내륙으로 보내기 위한 765kV 신고리~북경남 송전선로 건설 과정에서 주민들과 한국전력공사가 장기간 충돌한 사건이다. 주민들은 송전탑 예정지에 농성장을 만들고 밤낮으로 공사를 막았다.
안 씨는 당시 주민들이 비닐을 뒤집어쓴 채 산에서 밤을 새우고, 외부에서 온 연대자들에게 길을 안내하거나 음식을 날라주던 장면을 떠올렸다. 그는 “그때는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싸운 게 아니었다”며 “너무 절박해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고 말했다.
AI 시대 다시 커지는 전력 수요
안 씨가 밀양에서 겪었던 전력망 갈등은 AI 시대를 맞아 다시 현재 문제가 되고 있다. 6월 정부는 반도체·피지컬 AI·AI 데이터센터를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를 발표했다.
문제는 전력 생산과 공급이다. 반도체 공장과 AI 데이터센터는 대표적인 전력 다소비 시설이다. 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를 산업단지와 데이터센터까지 보내려면 송전선로와 변전소 등 전력망 확충이 뒤따라야 한다.
사업 추진 과정에서 정부가 강조하는 것은 ‘속도’다. 이재명 대통령은 7월 6일 청와대에서 열린 메가프로젝트 민관합동 점검회의에서 첨단산업 경쟁을 두고 “누가 더 빠르냐에 따라 결판이 난다”며 속도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지역사회에서는 속도 못지않게 주민 의견을 반영하는 절차가 중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대전·세종·충남·충북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는 7월 공동성명을 내고 3대 메가프로젝트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지역의 물과 전기, 토지와 주민의 삶을 내주어야 완성되는 계획인데도 정작 지역 의사는 어디에서도 묻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AI 데이터센터 자체를 둘러싼 갈등도 나타나고 있다. 창원시는 20일 ㈜삼공퍼센트와 마산회원구 양덕동 일원에 AI 데이터센터를 건립하기로 하고 투자협약을 체결했다. ㈜삼공퍼센트는 양덕동 옛 성동조선 부지 2만772㎡에 총 1조894억 원을 들여 지상 4층, 수전용량 80MW 규모 AI 데이터센터를 건립할 계획이다.
하지만 협약 체결 닷새 뒤인 25일 마산창원진해환경운동연합은 사업 전면 재검토를 요구했다. 대규모 전력 소비와 소음, 열섬현상, 비상발전기에서 나오는 오염물질 등을 우려했다. 이와 함께 변전소와 고압 송전선로 등 추가적인 전력 인프라가 필요할 가능성도 문제로 제기했다.
26일 밀양시 상동면 고정마을 인근에 있는 송전탑 모습. /최은주 기자
“처음부터 주민들하고 투명하게 해야”
안 씨가 밀양 송전탑 사태에서 가장 중요하게 꼽는 교훈은 ‘사업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국가적으로 필요한 사업이라면 처음부터 주민들에게 정보를 충분히 공개하고 입지와 노선을 결정하는 과정에 주민을 참여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주민들하고 투명하게 해야 돼요. 주민들이 참여해서 부지 선정할 때부터 해야죠. 밀어붙이면 절대로 안 돼요.”
그는 갈등이 커진 이유 가운데 하나로 사업 추진 과정에 대한 불신을 꼽았다. 주민들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의견을 듣는 과정이 부족했다고 본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투명하게 했으면 됐다”며 “당시 마을에서 조금이라도 멀리 떨어뜨려 피해를 줄일 방법이 있었는데 공사비를 절약하는 쪽으로 갔다”고 회상했다.
그가 가장 안타까워하는 것은 철탑 자체보다 마을 공동체에 남은 상처다. 보상과 합의를 둘러싸고 주민들이 갈라지면서 친척과 이웃 사이 왕래가 끊긴 사례도 있다. “옛날에는 보름날이면 마을에서 잔치를 하고 윷놀이도 했어요. 그런 게 싹 없어져 버렸어요.”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당시 갈등은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돈을 받은 사람도 부자가 된 게 아니고, 안 받은 사람도 굶어 죽은 게 아니에요. 그런데 그 돈 때문에 사촌이고 형제고 등을 지고 살아요. 그게 아직도 안 풀렸어요.”
/최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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