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예

명나라 척박한 기후에서 떠올린 ‘개성 자하동’…고려가 사랑한 골짜기[장지연의 역사 상상력]

1389년(창왕 1) 한여름, 명나라로 향하는 일군의 사신단이 개성에서 출발했다. 그 길은 지독히 멀고도 험했다. 당시 명의 수도는 남경에 있었기에, 대도(베이징)를 수도로 하던 원나라 때보다 훨씬 긴 거리를 이동해야 했다.

권근이 이역만리서 그리워한 곳

개성시 자하동 골짜기에 위치한 안화사 전경. 네이버 지식백과 제공

고려 창왕 즉위를 인정받기 위해

홍무제 설득하러 중원으로 간 권근

신문물 대신 고국산천 그리움 기록

개성 송악산 아래 궁성 옆 골짜기

신선이 산다는 송도 팔경 중 하나

당대 학자들에겐 돌아가고픈 고향

채홍철 유유자적 지은 ‘자하동곡’

조선을 거쳐 지금까지 가사 전해져

1389년(창왕 1) 한여름, 명나라로 향하는 일군의 사신단이 개성에서 출발했다. 그 길은 지독히 멀고도 험했다. 당시 명의 수도는 남경에 있었기에, 대도(베이징)를 수도로 하던 원나라 때보다 훨씬 긴 거리를 이동해야 했다. 이때의 사신단은 요동을 지나 북경까지 육로로 이동한 뒤, 배를 타고 운하를 따라 남경까지 갔다. 황해를 건너다 조난당할 위험이 컸던 10여년 전보다는 나아졌지만, 그렇다고 ‘1만리’ 길 사행이 편할 리는 없었다.

더구나 시점이 심상치 않았다. 위화도 회군이 일어난 지 불과 1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명과의 전쟁 위기를 겨우 넘긴 고려는 우왕을 폐위하고 창왕을 세웠다. 새 국왕의 즉위를 인정받아야 했던 고려로서는 명의 홍무제를 설득하는 일이 시급했다. 불행히도 첫 번째 사행에서 이색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오자 고려에서는 바로 두 번째 사절단을 꾸린다. 바로 이 사절단에 30대 후반의 양촌 권근(1352~1409)이 있었다.

시급하고 첨예한 국가적 문제를 해결해야 했기에 막중한 책임감과 부담감도 있었겠지만, 권근은 은근한 사적 기대를 품고 있기도 했다. “황제의 조정에 조회함으로써 자신의 견문을 넓히는 데다 널리 유람하고 싶던 평소의 생각을 드디어 실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이들이 견문을 넓히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다. 그러나 권근의 집안과 그가 살던 시대를 고려하면 그저 상투적인 표현으로만 넘길 것은 아니다.

권근은 안동 권씨 가문 출신이다. 고려와 원을 오가며 정계와 학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온 인물들이 이 집안 및 이들과 연결된 가문들에서 대대로 배출됐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이가 그의 증조부 권부의 사위였던 이제현(1287~1367)이다. 고려 말을 대표하는 학자이자 정치가인 이제현은 대도에서 원의 유명 학자들과 교류하고 충선왕의 귀양길을 수행하여 멀리 토번까지 다녀왔다. 그는 권근이 열다섯 살이던 해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런 집안 배경을 볼 때 권근은 어른들에게서 원이 흥성하던 시절의 문물과 그곳에서 사귄 지식인들 얘기를 들으며 자랐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불행히도 철들 무렵 원이 망한 데다, 새로 들어선 명과 고려의 관계가 불안정한 바람에 그가 중국의 문물을 직접 접할 기회를 잡기는 어려웠다.

삼십 후반이 되어서야 드디어 명에 가게 된 권근은 이 기회를 그냥 흘려보낼 수 없다며 “보고 들은 것이라면 반드시 기록해서 시를 지어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양촌집> 봉사록). 그런데 막상 그가 먼 타국에서 절실한 감정을 담아 기록한 것은 휘황한 대륙의 문물이 아니었다.

고려후기 문신 채홍철이 자하동에 있던 자기 집 남쪽에 중화당을 짓고 원로 8명과 신선 같은 은퇴 생활을 즐기며 지은 ‘자하동곡’. 네이버 지식백과 제공

타국에서 떠올린 고향의 샘물

출발은 좋았다. 개성을 떠나 평양성을 거쳐 고려 경계를 벗어나기 전까지는 괜찮았다. 관리들의 융숭한 접대를 받으며, 잔치도 즐기고 여름날의 흐드러진 연꽃도 구경하며 순탄히 나아갔다. 그러나 비를 맞으며 압록강을 건너면서 본격적인 고생길이 열린다. 깊은 산길에서는 짐승 울음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가 멀리 인가 한두 채가 보이면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요동성처럼 관아가 있는 곳에 닿으면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지만, 도시를 벗어나면 다시 진창길과 무더위가 기다렸다.

푹푹 빠지는 진창길에 수레까지 빠질 듯 말 듯 하고, 모기는 앵앵대며 말과 사람 주위를 떠날 줄 모른다. 찌는 듯한 한낮의 더위와 타는 듯한 목마름을 견디며 도착한 사령역에서 권근은 샘물을 길어오라 재촉한다. 얼마나 목이 말랐을까. 그런데 어렵게 받아 든 물은 누가 재라도 뿌린 듯 혼탁하기만 하다. 그 순간 권근은 한여름에도 서늘한 개경 자하동의 차가운 샘물을 떠올린다.

아스라이 생각난다 자하동 골짝

追思紫霞洞

맑은 시내 하얀 돌을 솟구쳐 흘러

淸溪激白石

땅에 가득한 솔 그늘이 서늘도 하여

松陰滿地

유월에도 살에서 좁쌀이 이네

六月膚起粟

차가운 샘이 여기저기 솟아나서

冷泉處處生

달고도 조촐해라 참으로 영액

潔眞靈液

자하동의 맑은 샘물에 대한 그리움은 이내 그렇게 맑은 샘물이 날 수 있는 이유에 대한 시상으로 이어진다.

맑은 기운 산천에 어리었기에

山川淑氣鍾

이름난 약도 많이 캘 수 있네

名藥多堪

부러운 바닷속의 저 삼신산은

海中三神山

우리나라 위해서 생긴 것이니

非爲我國

종당에 그곳으로 돌아가서

終當歸去來

유독을 즐기며 해를 마치리

卒歲藥幽獨

중원의 문물을 기대하며 떠난 그 길에서 권근은 뜻밖에도 고향의 샘물맛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그리움은 그렇게 맑은 샘물을 빚어내는 고국의 산천에 대한 자부심으로 펼쳐졌다.

권근의 필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전승되는 개성 자하동의 기억

자하동은 개성 송악산 아래, 고려궁성(만월대) 동편에 있는 골짜기다. 최충이 세웠다는 구재학당, 송 휘종의 어필이 걸려 있던 안화사가 모두 이 골짜기에 있었다. 신선이 산다는 풍문이 돌고, 이제현이 꼽은 송도의 팔경(‘자동심승’: 자하동의 중을 찾다)에도 들어갈 정도로 이곳은 개성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자하동을 그리워한 이는 권근만이 아니었다. 이제현 역시 중원에서 더위에 시달릴 때면 이곳을 떠올리곤 했다. 더워 죽겠는데 도대체 뭐 한다고 여기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던 때, 이제현은 이렇게 읊었다. “어느 때 나도 자하동에 돌아가서 베개 베고 솔바람 소리 들어볼는지”라고(<익재난고> 마상(馬上)). 자하동은 이들에게 언제고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었다.

자하동은 누군가의 고향일 뿐만 아니라 유명한 노래가 탄생한 곳이기도 했다. 채홍철(1262~1340)은 이곳에 있던 자기 집 남쪽에 중화당을 짓고 원로 8명과 모임을 하며 신선 같은 은퇴 생활을 즐겼다. 음률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는 ‘자하동곡’이라는 노래를 지었는데, 조선을 거쳐 지금까지도 그 가사와 악보가 전해질 정도로 유명한 노래였다.

지금은 남아 있는 악보만으로는 당시 음률과 장단을 정확히 복원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노래가 전승되던 시절에는 실제 노래의 무대가 된 장소에서 직접 연주한 이들이 있었다. 15세기 개성을 찾은 남효온의 일행이 바로 그러했다. 1485년(성종 16) 남효온의 개성 여행에는 거문고 연주로 당대 으뜸으로 꼽히던 이정은과 이총이 동참했고, 악사인 송회령까지 가세했다. 이들은 개성 곳곳을 찾으며 그곳에 연관된 고려가요를 연주하고 노래했는데, 절정은 자하동의 중화당 터 바로 그 자리에서 ‘자하동곡’을 연주한 것이었다. 개성을 방문한 다른 누구도 자하동의 진짜 중화당 터를 찾아내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으나, 이들은 그곳을 찾아낸 데 더해 당대 최고 고수의 손으로 그곳의 노래까지 연주했다. 이탈리아 나폴리의 보르고 산타 루치아에 가서 산타 루치아 노래를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개성의 자하동이다. 문헌을 읽고 전후좌우를 엮어 얻은 지식이다. 개성에 몇번 갔을 때에도 자하동 골짜기는 들어갈 수 없었다. 설령 몇번 가본다 한들 그 정도 경험으로 권근과 이제현이 타국에서 이곳을 떠올린 그 그리움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다 얼마 전 우연히 박완서의 <미망>에서 자하동 골짜기를 묘사한 부분을 읽었다. 종상이가 솟전골을 가려다 들른 이곳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묘사했다. “자하동 채하동 깊은 골짜기로부터 시작된 나깟줄(소천)은 은빛 모래땅만 골라 흘러 맑기가 구슬 같았고, 빨래를 눈처럼 희게 했다. 물가에 너른 바위마다 피륙채 마전해 넌 무명이 눈부셨다.”(<미망> 2) 그렇구나. 20세기 초반까지도 자하동은 물이 맑고 깨끗하여 송도에서 손꼽히는 아름다운 곳이었구나. 권근과 이제현이 그리던, 달고 시원한 샘물, 신선을 부르는 아름다운 노래가 지어진 계곡, 깨끗하게 빨래한 무명이 눈부시게 널리던 나깟줄. 순간 나도 왈칵 자하동이 그리워졌다. 누군가의 시와 노래, 오래된 기록과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단 한 번 가보지 않은 곳도 문득 그리워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기사 공유하기
페이스북X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i

댓글

0

후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이 기사에 첫 의견을 남겨보세요.

댓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