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양각색 ‘진’(zine)이 유행하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발행된 다양한 형태의 ‘진’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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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일대의 신혼여행을 떠나면서 하필이면 못난 청바지를 갖고 가다니! 김영진 슈퍼소닉 스튜디오 대표는 지난 2021년, 신혼여행지인 영국 런던 빅벤과 애비로드 등에서 촌스러운 청바지를 입고 찍은 기념사진을 한동안 덮어놨다. 그러다가 문득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 작은 책자인 ‘진’(Zine)으로 만들었다. 제목은 ‘(룩 앳 마이) 뉴진스’라고 달았다. 사진 위에는 좀 더 멋진 모양의 청바지 사진을 오려 붙였고, 종이를 들춰보면 실제 입은 ‘못난이 바지’의 매무새를 확인할 수 있게 했다. 서문에는 이렇게 썼다. “내 멍청한 청바지가 신혼여행 사진을 망쳤다. 그래서 사진 속에서는 멋진 핏의 청바지를 입은 걸로 하기로 했다.” 지난 7월17~18일 전북 전주에서 연 독립출판 북페어 전주책쾌에 ‘뉴진스’를 소량 만들어 가져다 팔았는데 뜻밖에 독자 반응이 좋았다. 배우자 겸 동반 창업자인 맹주희 대표도 밴드 오아시스를 위한 헌정 ‘팬진’(Fanzine, 팬+매거진)과 자신의 생일을 기념한 소책자 ‘맹맹절’을 만들었다. 전주책쾌 부스에서 ‘맹맹절’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가 찾아와 인사를 나눌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김영진 슈퍼소닉 스튜디오 대표가 만든 ‘(룩 앳 마이) 뉴진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슈퍼소닉 스튜디오’ 맹주희, 김영진 대표가 출판사 겸 디자인 스튜디오 ‘소장각’과 협업하여 제작한, 서울의 인디 음악 탐구 영어 가이드 진을 들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음악 관련 일을 하던 두 사람은 다니던 회사를 퇴사한 뒤, 인디 음악과 하위문화를 기획하고 연구하는 ‘슈퍼소닉 스튜디오’를 창립했다. 두 사람은 각종 음악 행사를 기획하고, 나라 안팎의 뮤지션들을 만나 진행한 ‘낫 소 시리어스 인터뷰’ 시리즈를 ‘진’으로 만들고, ‘진 만들기 워크숍’도 연다. 맹 대표는 “가장 독립적으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출판 형식인 ‘진’으로 나만의 이야기나 좋아하는 아티스트에 대한 애정을 표현할 수도 있다. 펑크 음악이나 서브컬처에서 ‘진’을 활용하는 것도 그런 이유”라고 말했다. 슈퍼소닉 스튜디오는 지난해 필리핀 세부 아트북페어 연사로 초청받았고 ‘진’ 판매자로도 나섰다. 다음달 독일 함부르크에서 여는 독립출판 페스티벌인 ‘인디콘’에도 참여한다. 곧이어 뒤셀도르프 쿤스트할레에서 여는 독립예술 출판 아트북페어인 ‘비트윈북스’에서는 연사로 초청받아 관객을 만날 예정이다.
디지털 세상에 숨 막힌 종이의 응수인가. 소규모 ‘인디 출판물’인 ‘진’이 화려하게 부활했다. 여러 연구와 브리태니커 사전 등을 종합하면, ‘진’은 소수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소규모 인쇄물 또는 온라인 간행물을 가리킨다. 인터넷 웹진도 ‘진’에 포함되나, 대개 종이 매체가 중심이다. 어린이가 손으로 삐뚤빼뚤 만든 책자, 학급 문집, 동아리 회보 등도 모두 ‘진’이라 할 수 있다. 조잡해 보이는 소식지부터 예술적인 아트북까지 형식과 모양도 제각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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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진으로 알려진 ‘더 코멧’ 1호(1930) 표지. 에스에프 독자들이 직접 만들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진’이라는 용어는 ‘팬’(fan)과 ‘매거진’(magazine)을 합친 ‘팬진’(fanzine)에서 유래했다. ‘진’의 기원을 논하면서 16세기 마르틴 루터의 팸플릿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지만, 대개는 1930년대 미국 에스에프(SF) 팬들이 제작한 동인지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최초의 ‘진’은 시카고 과학애호가들이 1930년 창간한 소식지 ‘더 코멧’(The Comet)이다. 이후 저렴한 인쇄 및 배포 비용 덕분에 ‘진’은 소외된 하위문화 창작자와 팬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1947년 에디스 아이드는 최초의 퀴어 팬진을 발행해 레즈비언 커뮤니티 독자들 대상으로 연극·영화 리뷰, 시, 사설 등을 선보였다. ‘진’과 ‘디아이와이’(DIY) 문화는 에스에프, 사회운동, 펑크를 비롯한 하위문화 예술계와 페미니스트, 퀴어 공동체의 중요한 축이 되었다.
‘쓴 맛 쓰는 여자들’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강배전(GBZ)의 진서하(왼쪽), 신유보 작가. 두 사람이 들고 있는 ‘진’은 한권으로 이뤄져 있으나 서로 등을 맞댄 ‘도자도’ 바인딩 방식으로 만들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등을 맞대고’.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21세기에 이르러 ‘진’은 독립적인 매체의 정신을 이어가는 동시에 다양한 내용과 형태를 실험하며 확장하고 있다. 제1회 전주책쾌에서 인연을 맺은 신유보, 진서하 작가는 작년부터 ‘글 쓰는 여자들’의 정체성을 담아 독립출판사이자 작가 그룹인 ‘강배전’(GBZ)을 만들고 활동을 시작했다. 강하게 볶은 커피 원두처럼 씁쓸하지만 깊고 진한 삶의 면모와 감정을 담아내는 글쓰기를 지향한다는 뜻을 담았다. 전주책쾌에서 첫선을 보인 진 ‘등을 맞대고’는 두권의 책이 샴쌍둥이처럼 맞붙어 있다. 신 작가가 쓴 ‘오빠를 사랑해’와 진 작가가 쓴 ‘그러나 모를 일이다’를 이어 붙인 것이다.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이성애 관계 또는 결혼 제도라는 ‘정상성’을 두고 버석거리는 마음을 가진 여자들의 이야기를 각각 담았다. 이 책을 만들 때 선택한 ‘도자도 바인딩’(Dos-à-dos binding)은 프랑스어로 ‘등 대 등’이란 뜻으로, 두권의 별도 도서를 묶어 한 권의 앞표지가 다른 권의 뒤표지로 사용되는 구조다. 16세기 유럽에서 성경을 묶을 때 쓰기 시작한, 유서가 깊은 제본 방식이다. 진 작가는 “결혼, 덕질, 그리고 사랑을 고민하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등을 맞댄 것처럼 맞닿아 있다고 생각돼서 이런 제본 방식을 택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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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사의 ‘스틸 오브제’. 정원사 제공
‘진’을 만들 때 좀 더 시각적이고 수공예적인 오브제의 형태로 나아가는 흐름도 있다. 디자인 스튜디오 ‘정원사’ 이원희, 정은지 대표는 예전에 외국에서 수입한 유리 기물들을 판매하는 일을 했는데, 각자의 방식으로 오브제를 보고 기록한 그림과 단상을 엮어 ‘스틸 오브제’를 펴냈다. 독립출판물이라기보다 소장용 아트북에 가깝게 아름다운 형태를 띤 책이다. 소규모 독립출판물로서 ‘진’은 대부분 국제표준 도서번호(ISBN)를 받지 않지만, 이 책은 도서번호를 받았다. 이 대표는 “한권 한권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들어 1쇄를 150부밖에 찍지 않았지만, 도서번호를 받으면 (국립중앙도서관에) 납본을 하게 돼 있기 때문에 기록의 측면에서라도 남기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난 7월18일 전주 남부시장 문화공판장 작당에서 연 ‘전주책쾌’에서 첫선을 보인 ‘얼굴-들’ 시즌 2를 손에 든 저자 황은주(왼쪽부터), 황희수, 강소영 얼굴들 대표.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수공예적인 형식미를 갖춘 ‘작품’이면서, 신속하고 강력하며 즉각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매체’라는 양가적 매력이 ‘진’에는 있다. 1인 출판사 겸 북살롱 ‘얼굴들’ 강소영 대표는 ‘얼굴-들’이란 제목의 ‘진’을 펴내고 있는데, 신덕호 디자이너와 함께 형태와 디자인을 오래 상의해 봉투에 넣은 형태로 제작했다. 시즌 1이 붉은색 봉투에 담겨 있었다면 작가 이주혜, 황은주, 황희수, 희정의 글을 담은 시즌 2는 노란 봉투에 넣었다. 강 대표는 “읽기의 호흡이 짧아진 시대에 ‘진’은 단행본보다 가볍고 빠르게, 시의적절하게, 즉각적으로 만들어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 책의 권위를 가지면서 텍스트에 집중할 수 있는 장점도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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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형 진’은 서구의 저항 문화적 디아이와이 전통에서 영향받은 형태와 한국의 자생적 출판 문화에서 발전된 형태 등 다양하고 혼종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진’ 문화연구자 한지은씨는 “‘진’은 서구에서 시작된 용어이지만, 한국에도 이미 다양한 자생적 소규모 출판 문화가 존재했다”고 말했다. 그가 쓴 석사 논문 ‘1987년부터 오늘날까지, 한국 진 문화의 지형도 그리기’(2025)를 보면, 한국의 경우 군사독재 시절 사상과 출판의 자유가 억압받다가 민주화 이후 정치적 긴급성이 다소 완화되면서 다양한 정체성과 관심사를 중심으로 회지, 동인지 같은 매체가 발전했다.
지난 7월18일 전북 전주 남부시장 문화공판장 작당에서 연 독립출판 북페어 ‘전주책쾌’. 독립출판사 상당수가 ‘진’을 들고 부스를 차렸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1987년 이후 복사기 등의 보급으로 선언문과 유인물 같은 자율적 소규모 출판물이 활발히 제작·배포되기 시작했고, 이후 다양한 정체성과 관심사를 가진 집단이 ‘진’의 형태로 공동체 내부에서 소통했다. 최근엔 소셜미디어의 확산과 함께 자신의 이상을 표현하고 전파하기 위한 대안적 출판 실천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성 동인 오타쿠나 서브컬처 집단도 자신들만의 커뮤니티와 인쇄, 유통 경로를 적극 활용하여 독자적인 출판 문화를 활발하게 이어가고 있다.”(한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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