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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타임즈=김지호 기자] 국민연금이 2026년 정기 주주총회 시즌에서 이사 선임, 정관 변경, 자사주, 임원 보수 등 핵심 안건 전반에 걸쳐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를 이어가며 '견제하는 주주'로서의 역할을 한층 강화하고 있다.
이전 정권에서 친지배주주 성향을 보였던 것과는 달리 단순 찬반을 넘어 기업별·안건별로 기준을 적용하는 '선별적 개입' 전략이 뚜렷해지면서, 시장에서는 국민연금이 국내 기업 지배구조를 좌우하는 핵심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24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국민연금의 달라진 스탠스는 이날 열린 고려아연 정기 주주총회를 앞두고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 회사는 영풍·MBK 파트너스와 1년 6개월 넘게 경영권 분쟁을 이어가고 있다.
24일 서울 중구 코리아나호텔에서 열린 제52기 고려아연 정기 주주총회가 중복위임장 문제로 지연되고 있다./사진=회사
이번 주총의 핵심 안건은 경영권에 직결되는 이사 선임이다. 현재 고려아연 이사회는 15명으로, 최 회장 측 추천 이사가 11명, MBK·영풍 측이 4명으로 구성돼 있다. 주총에서는 임기가 만료되는 이사 6명(최 회장 측 5명·MBK 측 1명)에 대한 후임 선임이 논의됐다.
최 회장 측은 상법 개정에 따른 감사위원 분리 선임을 이유로 5명의 이사를, MBK·영풍 측은 6명의 이사를 선임해야 한다고 각각 주장했다.
해당 안건은 집중투표제에 따른 이사 선임에 관한 것이다. 집중투표제는 선임하려는 이사의 수만큼 의결권을 주주에게 부여하고 원하는 후보에게 몰아주는 방식으로 투표할 수 있게 한 제도다. 국민연금이 표를 행사하지 않기로 한 것은 결국 최 회장의 재선임에 사실상 반대 또는 견제 의사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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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국민연금은 올해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을 포함한 회사 측 이사 후보들에게 표를 행사하지 않거나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사내이사 재선임에 도전한 최 회장과 황덕남 후보에는 의결권 '미행사'를, 감사위원회 위원이 되는 김보영·이민호(사외이사) 후보에는 '반대'를 결정했다.
다만 국민연금은 영풍과 그 계열사 와이피씨(YPC), MBK파트너스 측인 한국기업투자홀딩스가 제안한 박병욱 이사 후보에도 '미행사'를 결정했다.
그러나, 국민연금은 YPC, 한국기업투자홀딩스가 제안한 최연석, 최병일, 이선숙 이사 후보와 의결권을 크루서블 JV(조인트 벤처)가 제안한 월터 필드 맥랠런 이사 후보에 절반씩 나눠 행사하기로 하였다.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책위)는 이들 의결권 '미행사', '반대' 대상자들이 "기업가치 훼손 내지 주주권익의 침해 이력이 있는 자 등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시장에서는 이를 두고 이사회 내 견제와 감시 기능 강화를 요구한 결정으로 해석하고 있다.
앞서 MBK·영풍 측은 최 회장이 2019년부터 2021년 사이 엔터테인먼트 기업 4곳에 320억원을 개인 투자한 뒤, 고려아연이 주요 출자자로 참여한 원아시아파트너스를 통해 같은 기업들에 약 800억원이 후속 투자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청호컴넷 관련 200억원까지 더하면 고려아연 자금 1000억원 이상이 최 회장 개인 투자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구조 속에서 활용된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고려아연 측은 "재무적 투자 목적으로 회사의 여유 자금을 펀드 등 금융상품에 투자하고 있으며 모든 투자 결정과 출자는 관련 법령과 내부 절차에 따라 적법하게 진행되고 있다"며 "회사는 펀드의 출자자인 LP로서 구체적인 투자 계획 수립과 집행은 GP인 운용사가 독립적으로 수행한다"고 반박했다.
이 뿐 아니라 국민연금의 견제는 금융·증권업계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진옥동 신한금융지주 회장, 김미섭 미래에셋증권 대표, 양홍석 대신증권 부회장 등에 대해 사내이사 선임 반대 의결권이 행사됐다. 수책위는 기업가치 훼손 이력, 주주권익 침해, 내부통제 책임 등을 반대 이유로 들었다.
정관 변경 안건에서도 국민연금은 이사 수 축소, 임기 조정, 전자주총 배제 등 주주 권한을 제한할 수 있는 안건에 대해 대거 반대했다. 특히 집중투표제 효과를 약화시키는 구조 변화에 대해서는 '상법 취지에 반한다'며 사실상 사전 차단에 나섰다.
자사주 정책과 임원 보수 역시 주요 점검 대상이다. 국민연금은 미래에셋증권 자사주 취득 목적과 실제 활용이 불일치하는 경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고, 네이버, LG이노텍, SK바이오사이언스, KB금융지주, 하이트진로 등 주요 기업의 보수 한도에도 제동을 걸었다. 롯데지주, 셀트리온, CJ대한통운, SK이노베이션 등 정관 변경에도 반대했다.
특히 수책위 위원장을 근로자단체가 추천한 이연임 전 한국금융투자협회 부부장이 맡으면서 이 같은 기조는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
다만 국민연금의 반대에도 실제 주총에서는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 사례도 확인된다. 이날 고려아연 주총에서 회사 측 주장대로 5명의 이사 선임안이 통과됐다. 이에 따라 고려아연 이사회는 최 회장 측과 MBK·영풍이 9대 5 구도로 재편되게 됐다. 만일 6명 이사 선임안이 통과됐으면 9대 6 구도로 최 회장의 경영권이 유지되더라도 MBK·영풍 측이 보다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다.
MBK·영풍 측은 "고려아연이 집중투표제 표결 기준을 뒤집었다"며 반발했다. 이들에 따르면 집중투표제에서는 선임할 이사 수에 따라 의결권이 배수로 부여되지만, 일부 해외 기관투자자는 특정 후보에 대해서만 의결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행사되지 않은 표가 발생하는데, 이를 그대로 인정할지, 아니면 비례적으로 재배분할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고려아연은 지난해 주주총회에서 이러한 상황에 대해 예탁결제원 집계 기준을 그대로 인정하는 방식을 채택하며 기준을 확정한 바 있다. 지난해는 미행사된 의결권을 별도로 재배분하지 않고, 실제 행사된 표만을 기준으로 결과를 산정하는 방식을 적용했다. 그러나 이번 주총에서는 기존과 달리 과소표결된 의결권까지 포함해 비례적으로 재배분하는 ‘프로라타(pro rata)’ 방식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기존 기준을 뒤집었다.
MBK·영풍은 "이미 적용된 기준을 주총에서 갑자기 변경한 것은 단순한 해석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결과에 직접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이번 기준 변경이 치열한 표 대결 국면에서 이뤄졌다는 점에서 논란은 더욱 커질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24일 서울 중구 미래에셋센터원빌딩에서 개최된 제57기 미래에셋증권 정기 주주총회/사진=회사
미래에셋증권은 이날 주총에서 김미섭 부회장 등 경영진 재선임 안건을 원안대로 통과시켰다. 또 약 6347억원 규모의 배당과 자사주 소각 등 대규모 주주환원 정책도 확정했다. 대신증권 역시 국민연금 반대에도 이날 주총에서 양홍석 부회장을 사내이사로 선임했다. 네이버도 보수한도 안건이 주총에서 승인됐다.
시장에서는 국민연금의 변화에 대해 '작년과 달리 명확한 반대와 배제를 선택하며 행동주의 기관투자자로 진화했다' 평가와 '여전히 실제 주총 결과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는 엇갈린 평가가 나온다.
그럼에도 국민연금의 영향력이 주총 이후 더 크게 나타날 것으로 보고 있다. 표결 결과보다 기업 의사결정 과정 전반에 대한 사전 규율 기능이 강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국민연금의 영향력은 오히려 주총 이전 단계에서 확대될 수 있다. 기업들이 사전에 ▲이사 선임 구조 ▲자사주 활용 방식 ▲보수 체계 등을 조정하며 국민연금 기준을 반영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 주총 시즌은 국민연금이 단순 투자자를 넘어 기업 경영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시장 규율자'로 자리잡는 분기점이 될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 같은 움직임은 정부의 스튜어드십코드 강화 기조와도 맞물린다.
앞서 이억원 금융위원장은 이재명 대통령이 18일 청와대에서 주재한 '자본시장 안정과 정상화를 위한 간담회'에서 기관투자자의 적극적 경영 감시기능을 유도하는 스튜어드십코드를 내실화하고, 기관투자자들의 충실한 코드 이행 여부에 제3자 점검체계를 신설해 이행·미이행 기관 명단을 공시하겠다는 내용의 '위기에 강하고, 국민이 신뢰하는 자본시장 체질개선 방안'을 발표했다.
김남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튿날인 19일 국회 당정협의에서 "스튜어드십코드 이행 점검·평가 시스템을 도입해 주가가 낮게 매겨져 있는 기업의 가치를 높이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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