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정길선 칼럼니스트.
1848년 여름,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에서 유럽 전역에 혼란이 빠지던 1848년, 프랑스에서 혁명에 호응한 지식인들이 몰도바에서 혁명을 일으키기로 했다. 6월 9일, 서부 왈라키아의 이슬라즈(Islaz) 마을에서 농업 시민 조직인 엘리아데 – 라둘레스쿠(Eliade - Radulescu) 회원들이 농민들을 소집한 이후, <이슬라즈 선언문(Proclamaşia de la Islaz)>을 반포했다. 그들은 이 선언문에서 왈라키아의 완전한 독립, 언론의 자유, 법 앞의 모든 사람의 평등, 새로운 조세 제도 도입, 방위군 창설, 무료 교육, 제헌의회 직접 선거, 통치자 지위 단순화 및 대통령 직위 도입, 농민에게 보야르 토지 분배 등을 역설했다. 그 후 대규모 봉기를 일으킨 시민들이 부쿠레슈티 광장에 집결한 뒤 고스포다르 궁전으로 향했고, 군대와 경찰은 이들을 저지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후 소규모 혁명가들이 궁전에 들어가 게오르게에게 이슬라즈 선언문을 넘겼으며, 게오르게는 1848년 6월 11일 이 선언문에 서명했다. 이슬라즈 선언문은 왈라키아 헌법으로 선포되었으며, <유기적 규제>는 폐지되었다. 게오르게는 6월 13일 보이보드에서 퇴임했고, 혁명 정부가 몇 개월 동안 왈라키아를 지배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 파디샤 압뒬메지트 1세가 파견한 오스만 제국군 20,000명이 이들을 진압했고, 콘스탄틴 칸타쿠지노가 오스만 사령관 푸아드 파샤의 권유를 받아들여 9월 22일 카이마캄(Caimacam, 임시 통치자)에 발탁되었다. 이후 콘스탄틴 칸타쿠지노(Constantin Cantacuzino)는 압뒬메지트 1세의 지시를 받은 푸아드 파샤의 권고에 따라 혁명 지도자들을 대거 체포하여 코트로체니(Cotrocheni) 수도원에 감금했다. 또한 이전 정권의 핵심 인물이었던 코스타체 아리스티아(Kostake Aristia), 세자르 볼리악(Cezar Bolliac), 이온 브라티아누(Ion I. C. Brătianu), 디미트리 브라티아누(Dimitrie Brătianu), 슈테판 골레스쿠(Ștefan Golescu), 콘스탄틴 알렉산드루 로세티(Constantin Alexandru Rosetti), 이오아사프 즈나고베아누(Iosafat Snagoveanul), 보이네스쿠 2세(Voinescu al II-lea) 등을 추방했다. 한편, 그는 혁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농민들이 보야르들의 영지를 약탈하고 방화한 사건을 조사하는 위원회를 설립해, 이와 관련된 농민들을 대거 처형하거나 유배했다. 그리고 급진적인 교사들의 숙청을 시작했으며, 11월 1일 혁명의 진원지 역할을 했던 학교들을 모조리 폐쇄했다. 그런데 왈라키아 정교회 주교구에서 혁명을 동조하는 수도자들을 추방하라는 권고를 내렸다.
1848년 11월, 콘스탄틴의 장남 이온 칸타쿠지노가 아버지의 정권을 전복하려는 계획을 세우다가 러시아 군에 소속된 카자크에게 체포되어 코트로체니로 끌려갔다가 이후에 석방되었다. 1849년 3월, 또 다른 아들 그리고레는 부쿠레슈티의 모물로(Momulo)에서 연극을 조직해 헝가리로 망명한 혁명가들에게 동정을 표시했다. 이 행사는 오스만 제국의 검열 칙령에 논란리 되는 부분이었지만, 콘스탄틴은 이를 모른척했다. 1848년 9월 28일, 칸타쿠지노는 푸아드와 함께 임시정부의 노예 제도 폐지를 취소하고 해방되었던 로마인들에게 주인에게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1849년 2월에는 임시정부가 140만 탈러를 불법적으로 지출한 사실이 밝혀졌다며, 이 적자를 왈라키아에 있는 혁명가들의 사유 재산을 몰수하여 메우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혁명동안 거의 완전히 파괴된 부쿠레슈티의 러시아 군인 기념비를 복원하기 위한 기금을 다르게 마련했다. 그러나 콘스탄틴의 통치는 명목상으로만 이루어졌으며, 실제 권력은 오스만 사령관 푸아드 파샤와 러시아 위원 알렉산데르 니콜라예비치 뤼더스(Alexander Nikolaevich Liders) 백작이 행사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왈라키아 인들은 러시아군의 유지비를 지불해야 했으며, 오스만 제국에 바쳐야 하는 공물이 20% 증가했다.
왈라키아 정부는 300,000루블을 대출 받았는데, 대부분은 러시아 군 유지비로 사용되었다. 자연히 왈라키아 인들은 강한 반감을 품고, 그를 타도하려는 음모가 곳곳에서 횡행했다. 1849년 6월, 콘스탄틴 칸타쿠지노의 카이마캄 임기가 만료되었고, 바르부 슈티르베이(Barbu Știrbey)가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 압뒬메지트 1세의 후원으로 인해 새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바르부 슈티르베이는 러시아 당국에 뇌물을 주고 그들의 용인을 얻어낸 뒤, 보이보드에 취임했다. 바르부는 통치자로서 행정, 재정, 공교육 분야에서 개혁을 실시했다. 저축과 공공 지출의 엄격한 통제를 통해 국가 부채의 3분의 2를 줄였고, 부쿠레슈티에 극장을 세웠다. 1848년 혁명 동안 폐쇄된 학교를 다시 열었으며, 사법부의 행정 소송이 좀 더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했다. 또한 농민들이 보야르들의 토지를 분할받는 토지 개혁을 추진했지만, 콘스탄틴 칸티쿠지노 등 보수파의 강력한 반대로 인해 지지부진했다. 한편, 로마인 노예 제도에 있어서 노예의 내부 거래를 제한하고, 내부 거래로 인한 가족의 분리를 금지했다.
1853년 10월 크림전쟁이 발발한 이후, 러시아 군이 10월 29일 왈라키아에 진주했다. 바르부 슈티르베이는 비엔나로 피신했다가, 러시아 군이 철수한 이후인 1854년 10월 5일 부쿠레슈티로 돌아와서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복위했지만, 더 이상 행동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왈라키아에 진주한 오스트리아군의 감독을 받아야 했다. 1856년 크림전쟁의 종식을 알리는 파리 협약이 진행되고 있을 때, 그는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의 통합을 제안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1865년 6월 25일 바르부의 보이보드로서의 7년 임기가 끝난 이후, 알렉산드루 2세 기카가 카이마캄에 발탁되었다. 그는 카이마캄으로서 1856년 7월 4일부터 1858년 10월 18일까지 통치했는데, 이 기간 동안 민간 및 군사 구급대 학교를 설립했고, 이 학교 책임자인 게오르게 코스타포루(Gheorghe Costaforu) 교수에게 독일, 프랑스, 스위스 등 유럽 각지를 6개월 동안 연구 여행하도록 했다. 1858년 10월 18일 왈라키아의 세 귀족 이오안 마누(Iancu Manu), 에마누일 발라누(Emanoil Băleanu), 이오안 알렉산드루 필리페스쿠가 알렉산드루 2세 기카로부터 정권을 넘겨받은 이후, 몰다비아 임시 의회와 함께 양국의 통합을 논의했다.
많은 인사들은 러시아 제국, 합스부르크 제국, 오스만 제국의 간섭에 대응하기 위해 외국인 군주를 데려와 두 공국을 통합한 국가를 세우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1859년 1월 17일에 열린 선거에서, 루마니아인이 지도자가 되기를 바라는 다수 유권자들의 강력한 지지로 인해 몰다비아 출신의 알렉산드루가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선출되었다. 한편 왈라키아에서는 몰다비아와의 통합을 원하지 않는 보수주의자들이 정계를 장악했지만, 각자 후보를 내세우며 분열했기에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그 사이에 양국의 통합을 강력히 원하는 국민당이 알렉산드루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알렉산드루는 1859년 2월 5일 선거에서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선출되었다. 1862년 2월 5일, 알렉산드루는 연합 주의자들의 지원으로 인해 두 나라의 의회와 정부를 통합하여 정치적 연합을 달성하고, 스스로 돔니토르(Domnitor, 군주 또는 통치자)를 칭했으며, 국호를 루마니아 연합 공국으로 정했다. 이리하여 왈라키아 공국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된다. 1853년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서 벌이진 크림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이 승리하면서 두 공국은 러시아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1856년 파리조약이 체결되면서 두 공국은 종주국인 오스만 제국과 5개 열강인 영국, 프랑스 제2 제국,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그리고 크림전쟁 참전국인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이렇게 7개국의 공동 관리하에 놓이게 되었는데 오스트리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열강 관리단은 두 공국을 하나의 국가로 완전히 통합하는 것이 아닌 최소한의 연합으로 두는 것에 합의하였다. 1859년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의 군주를 선출하는 선거에서 두 공국 모두 통합파의 대표 정치인인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Alexandru Ioan Cuza)를 자국의 군주로 선출하였다. 이로써 두 공국은 한 명의 군주를 공동으로 모시는 동군연합으로 사실상의 통합을 달성했다. 이후 1862년 쿠자는 두 공국의 행정부를 하나로 통합하여 국호를 루마니아 연합 공국으로 변경하게 되었다. 쿠자의 통치 아래 공국은 근대화를 이룩하였다. 자유주의적이었던 쿠자는 행정, 농업, 교육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개혁을 실시하였고 특히 민주주의적 가치 아래 농노 해방과 토지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토지 개혁으로 손해를 보게 된 지주들의 극심한 반대로 인해, 토지 개혁의 성과는 지지부진했다. 결국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 양쪽에서 인망을 잃은 쿠자는 1866년 쿠데타로 퇴위당했다.
쿠자가 퇴위당한 이후에 루마니아는 혼란에 빠졌고 열강들은 두 공국의 통합 기한을 쿠자의 통치가 끝날 때까지 만으로 정했기 때문에 두 공국의 연합은 해체될 위기에 놓이게 된다. 결국 루마니아의 정치인들은 쿠자의 다음 군주로 호엔촐레른 가문의 호엔촐레른 지크마링겐(Hohenzollern-Sigmaringen) 공작 카를을 카를 1세(Karl I)로 추대했다. 카롤의 즉위와 동시에 헌법이 반포되면서 입헌군주정이 실시되었다. 1875년부터 오스만 제국령 발칸반도에서 반(反) 오스만 반란이 연이어 발생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오스만 반란을 일으킨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학살을 자행했고 이를 빌미로 러시아 제국은 1877년 4월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하면서 제2차 동방전쟁이 벌어졌다. 이 시기까지 명목상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었던 루마니아에서도 독립을 선언하고 오스만 제국과의 종주 관계를 완전히 청산해야 한다는 여론이 생성되었다. 이에 역시 루마니아의 독립을 지지하던 카를 1세는 러시아 군의 루마니아 영토 통과를 허가하고 같은 해 5월 10일 루마니아의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처음에 러시아는 평화 협상에서 루마니아에 지분을 내어주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루마니아의 참전에는 반대했다.
하지만 전쟁이 계속되고 불가리아 플레벤에서 벌어지는 공성전에서 러시아 군은 오스만 누리 파샤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피해가 커지게 되자 결국 루마니아에 참전을 요청하게 된다. 카를 1세는 참전 요청을 받아들였고 결국 플레벤 공성전에서 오스만 군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전쟁은 러시아-루마니아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1878년 산스테파노 조약과 베를린 회의로 인해 루마니아는 정식으로 독립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승전의 보상으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북부 도브루자를 할양받게 된다. 이후 루마니아는 헌법을 개정하여 1881년 루마니아 왕국을 선포하였고 카를 1세는 정식적으로 루마니아 국왕에 즉위하게 된다. 근대 시대에 이르러, 루마니아는 인접한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인해 발칸 국가들 중에서 가장 일찍 서구화 된 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 결과 1848년 혁명이 유행하던 시기에 분열되어 반목하던 독일 연방과 이탈리아 반도가 통일을 지향하는 대세에 동참하게 되었고 몰다비아 공국과 왈라키아 공국 역시 통일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이후로 11년이 지난 1859년, 오스만 제국에게 러시아 제국이 패배한 크림전쟁의 마무리 과정에서 왈라키아와 몰다비아는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를 공동 군주로 모시는 동군연합을 이루게 되면서 몰다비아-왈라키아 연합 공국이 탄생하였다. 이후 1862년 루마니아 공국으로 재편되었다. 쿠자는 열악한 상태의 루마니아를 근대화하기 위한 각종 개혁을 실시하였으나 토지 개혁에서 실패해 1866년 쿠데타가 발생했고, 이후 그는 축출되었다. 축출된 쿠자를 승계하여 카를 1세가 다음 군주로 추대되었으며 1877년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 제11차 러시아-투르크 전쟁이 발생하자 카를 1세는 루마니아의 명목상 종주국이던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러시아 편을 들어 참전해 승전국이 되었다. 그리고 1878년 같은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던 세르비아 공국, 몬테네그로 공국과 함께 독립을 얻었고 도나우 강 하류의 북부 도브루자를 전리품으로 얻었다. 독립한 루마니아는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은 발칸의 정세 속에서 자연스럽게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제1차 발칸 전쟁으로 얻은 마케도니아 지역을 둘러싼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의 갈등이 폭발했고, 이것이 제2차 발칸 전쟁으로 비화하자 불가리아와의 영토 분쟁 지역인 남부 도브루자를 노린 루마니아는 세르비아와 동맹을 맺고 불가리아를 배신했다. 결국 패전한 불가리아는 루마니아에게 남부 도브루자를 할양하는 굴욕을 당해야 했다. 이때 루마니아는 큰 영토를 거느리게 되었고 카를 1세의 치세 시대에 국력이 신장함으로써 발칸 반도에서는 유일한 라틴계 국가로 인식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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