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피 상장사 10곳 중 6곳. 코스닥 상장사 10곳 중 4곳. 시가총액이 장부가치에도 못 미치는 'PBR(주가순자산비율) 1배 미만' 기업 숫자다. 국회는 2년 연속 PBR 1 미만 상장사에 '기업가치 제고계획(밸류업)' 공시를 의무화하는 법안을 논의 중이다.
숫자로만 보면 개혁의 당위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현장에서 만난 기업인들의 표정은 달랐다. 낙인이 찍혔다는 서러움과 "무엇을 어떻게 더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한탄 섞인 감정을 드러냈다.
"수익성도 좋고 배당도 하는데, 업종이 죄악이다."
경기도 소재 코스닥 상장사 A사는 매년 10% 이상의 영업이익률, 꾸준한 배당, 지배구조 잡음도 없다. 그런데 PBR은 수년째 0.6배 수준이다. 이 회사 본부장은 요즘 주가 그래프를 보면 한숨부터 나온다고 토로했다.
A사 관계자는 "로봇, 인공지능(AI), 반도체 업종에만 섞여 있어도 시장이 열광하는데 자사 같은 제조업 기반 기업들은 내실을 다져도 '성장 모멘텀이 없다'는 이유로 소외된다"며 "수익성이 좋은데도 섹터가 매력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저평가받으니 고민이 많다"고 말했다.
A사만의 목소리가 아니다. ERP(전사자원관리)·핀테크 솔루션으로 매년 수백억원의 매출을 내는 B사 임원의 발언은 더 직접적이었다. 그는
"결국 테마가 없으면 안 된다는 건가. 우리도 로봇이나 AI를 해야 하나 생각이 든다"
고 운을 뗐다.
B사 임원은 "소프트웨어 회사가 무리하게 하드웨어 로봇 사업에 손댔다가 원가 구조만 망가지고 실적 꺾이는 경우를 수도 없이 봤다"며 "시장에선 그거라도 안 하면 도태된다고 하니, 경영진 입장에선 미칠 노릇"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데이터는 이 체감을 뒷받침한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업종별 PBR 격차는 극명하다. 지난해 말 기준 종이·목재(0.4), 전기가스(0.6), 건설(0.7) 등은 장부상 가치의 절반 수준에 머물러 있다. 반면 전기전자(2.3)나 제약(3.2) 등 꿈을 먹고 사는 섹터는 높은 프리미엄을 누린다.
묵묵히 본업에서 이익을 내는 전통 기업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연 매출 100억원도 못 내고 적자에 허덕여도 AI, 로봇 간판 하나면 시가총액 조 단위를 넘나든다. 업종별 특수성을 무시한 채 PBR 1배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가혹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물론 모든 저PBR 기업이 '억울하다'고만 볼 수는 없다. 전문가들은 저PBR의 원인을 먼저 입체적으로 뜯어봐야 한다고 말한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금융산업실장은 한국증시의 저평가 요인 중 수익성 저하가 36%, 낮은 주주환원이 37%로 4분의 3을 차지한다고 분석했다. 주가가 낮은 이유는 결국 시장이 그 기업의 미래 수익성이나 주주 친화 정책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김형균 차파트너스자산운용 본부장은 2가지 유형을 들었다. 산업 쇠퇴 또는 무능한 경영으로 ROE(자기자본이익률)가 자본비용보다 낮은 '경쟁 우위 상실형'과 현금·부동산은 쌓여 있는데 투자·주주환원을 하지 않아 ROE를 깎아먹는 '자본 배분 오류형'이 있다.
다만 매출·영업이익은 꾸준히 지속됐는데 시장에서 소외된 기업도 있다. 현금·부동산을 어떻게 활용할지 신중한 기업도 존재한다. 메자닌이나 유상증자를 반복해 주주가치를 희석시키는 기업도 있다. PBR 1배라는 단일 기준을 몰아붙이면, 억울한 기업은 더 억울하게 만든다. 실제로 고쳐야 할 기업은 반짝 공시로 위기를 모면하게 한다.
정부의 드라이브는 강경하다. 자본시장 업계에선 "정부 의지가 워낙 강력해 예외는 없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돈다. 시가총액 200억~300억원 이하 기업에 대한 관리종목 지정·퇴출 기조도 예전과는 다르다. 중복 상장 이슈도 과거에는 '관계사'라면 어느 정도 봐줬지만, 이제는 국물도 없다는 말이 나온다.
저PBR 기업들은 자사주 소각, 배당 확대, 주식 병합 등 카드를 검토하고 있다. 다만 이 조차도 재무 체력이 건실한 곳들의 이야기다. 당장 상장폐지 위기에 몰린 기업들은 '꾼'들의 유혹에도 노출된다. "M&A 호재 하나 터뜨려 주가 올려줄 테니 성과급을 달라"는 제안이 횡행하는 이유다.
더 심각한 문제는 '수치 맞추기식 경영'이다. PBR 1배를 '살짝' 넘기는 수준으로 주가를 관리하거나, 미래를 위한 설비투자(CAPEX) 재원을 갉아먹으면서까지 단기 배당을 늘리는 기업이 나타날 수 있다. 지표는 개선됐는데 기업의 체질은 약해지는 경우다.
전문가들은 업종별 특성을 고려한 다각도 평가 체계에 의거해 세금 감면 등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당근과 채찍'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공시의 질을 평가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소외된 우량주를 발굴하는 시장의 '눈'도 되살려야 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테마주 쏠림이 심화될수록 내실 있는 저PBR 기업은 설 자리를 잃는다. 기업 스스로도 IR을 통해 "낡은 기업이 아니라 기초가 튼튼한 기업"임을 증명하는 소통이 필요하다.
PBR 1배 미만은 낙인이 아니다. 그 신호를 받아 쥔 정책이 기업을 벼랑 끝로 몰아붙이는 채찍이 된다면,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는 수치의 게임으로 끝나고 만다. 공시 의무화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풀 수 있을까. 아니면 '반성문 쓰기'에 그치고 말까. 상장사들은 오늘도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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