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한강 작가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원작으로 한 연극 2편이 무대에 올랐다. 프랑스 연출가 줄리 델리케(왼쪽)의 ‘새’와 이탈리아 연출가 다리아 데플로리안의 ‘사랑이란 얼마나 끔찍한 고통인가’다. 예술경영지원센터, 연합뉴스
올해로 80회째를 맞이한 아비뇽 페스티벌 공식 초청작 가운데 2편이 한강 작가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원작으로 해 화제를 모았다. 프랑스 연출가 줄리 델리케의 ‘새’(7월 15~16일 교황청 중정)와 이탈리아 연출가 다리아 데플로리안의 ‘사랑이란 얼마나 끔찍한 고통인가’(7월 13~18일 카름 수도원 회랑)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주인공 경하가 친구 인선의 부탁으로 제주도를 찾아가 인선 어머니의 기억을 마주하며 제주 4·3 사건의 비극과 상처를 애도하는 이야기다. ‘새’는 원작의 1부를 중심으로 압축한 한·불 공동제작 낭독극이다. 프랑스 배우 이자벨 위페르와 한국 배우 이혜영이 각각 경하와 인선 역을 맡아 낭독한 데 이어, 원작자 한강이 끝부분에 직접 무대에 올라 5분간 한국어로 낭독했다. ‘사랑이란 얼마나 끔찍한 고통인가’는 원작 전체를 극화한 이탈리아 연극으로, 2024년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무대화했던 데플로리안이 각색·연출 및 출연까지 도맡았다.
두 유럽 여성 연출가가 제주 4.3 사건이라는 한국의 비극을 담은 ‘작별하지 않는다’를 무대화한 배경과 작품 이면의 고뇌를 문답 형식으로 정리했다.
줄리 델리케 “과거의 아픔 드러내는 것, 예술이 가진 저항의 힘”
프랑스 연출가 줄리 델리케의 ‘새’에는 프랑스 배우 이자벨 위페르(왼쪽)과 한국 배우 이혜영이 참여했다. (c)Christophe Raynaud de Lag, 아비뇽 페스티벌
-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무대에 올리게 된 배경은?
“아비뇽 페스티벌 예술감독인 티아고 호드리게스가 먼저 제안했습니다. 이번에 한국어가 ‘초청 언어’로 선정되고 한강 작가가 주요 게스트로 초청되면서 공연이 기획됐는데요. 호드리게스 감독의 제안으로 캐스팅한 배우 이자벨 위페르와 이혜영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이미 협업한 경험이 있어 잘 어우러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소설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아 원작의 1장을 중심으로 한 낭독극을 구체화하게 됐습니다.”
- 짧은 준비 기간에도 공연을 성황리에 마친 소감은?
“준비 시간이 매우 짧아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습니다. 역설적으로 이 강렬한 몰입이 팀의 유대감을 형성해 줬습니다. 연출, 배우, 자막, 통역 등 모든 팀원이 여성으로 구성되었는데, 두 여성의 우정과 아픔을 다룬 원작에 더 깊이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해 연출한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 원작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여성의 연대와 기억을 다뤘는데, 여성들로 팀을 구성했었습니다.”
지난 15일(현지시간) 아비뇽 페스티벌을 대표하는 교황청 안뜰 무대에 오른 낭독극 ‘새’ 공연이 끝난 후 한국 배우 이혜영(왼쪽부터), 한강 작가, 프랑스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가 객석에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 이번 작품을 통해 느낀 ‘언어와 예술의 힘’은 무엇인가?
“한강 작가의 문체는 지극히 다큐멘터리적이면서도 동시에 아주 시적입니다. 이 상반된 매력이 관객들을 학살의 기억 속으로 몰입하게 만들고, 프랑스어와 한국어라는 언어를 넘어선 관계가 형성되도록 합니다. 제주 4·3 사건은 유럽의 역사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프랑스 역시 나치에 협력했던 부끄러운 과거가 있고, 이를 교과서에 싣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미래 세대에게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서는 과거의 아픔을 숨기지 않고 소통해야 합니다. 예술은 역사적 사실을 드러내는 저항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 1부 중심의 구성과 한강 작가를 출연시켜 결말 부분을 낭독하게 한 이유는?
“소설이 방대해서 두 여성의 관계와 우정이 집약된 1부에 집중했습니다. 결말부에 한강 작가를 모신 이유는 관객들을 꿈같은 허구의 세계에서 갑작스러운 현실의 세계로 끄집어내는 충격을 주고 싶어서였습니다. 다만 올가을 서울국제공연예술제 공연에서는 한강 작가가 참여하지 못해, 메시지를 이어가기 위해 여중생 또래의 소녀를 무대에 세우려고 합니다.”
- 무겁고 예민한 사회적 주제를 다룰 때의 철학은 무엇인가?
“나의 개인적 관점을 관객에게 강요하는 것을 가장 경계합니다. 연출가는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원작자와 배우들의 예술성이 무대 위에서 더 빛나도록 뒤에서 지원하는 조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리아 데플로리안 “단절이 아닌 ‘이어짐’…우리에게 필요한 사랑 이야기”
이탈리아 연출가 다리아 데플로리안의 ‘사랑이란 얼마나 끔찍한 고통인가’에는 3명의 배우가 출연한다. 데플로리안(왼쪽)은 경하 역으로 직접 출연했다. (c)Christophe Raynaud de Lage, 아비뇽 페스티벌
- ‘채식주의자’에 이어 다시 한강 작가의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채식주의자’가 깊은 외로움과 단절을 다뤘다면 ‘작별하지 않는다’는 연결과 유대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세상의 폭력에 맞서는 우정과 가족의 연결이 크게 다가왔어요. 무엇보다 한강 작가가 인터뷰에서 ‘이 책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한 것을 듣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작품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 제주 4·3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직접 제주도를 찾았는데...
“저와 조감독, 배우 모니카 피제두가 함께 일주일간 제주도에 머물렀습니다. 지난해 부산연극제에서 ‘채식주의자’ 공연을 마치고 제주로 가 4·3 평화기념관에서 온종일 시간을 보내고, 제주의 풍경을 직접 눈에 담았습니다. 현장을 경험하고 나니 책 속 풍경이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 낯선 타국의 역사적 슬픔을 다루며 어떤 감정을 느끼셨나요?
“전혀 알지 못했던 역사였기에 많은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작품을 관통하는 강렬한 슬픔은 무력감을 주는 슬픔이 아니었어요. 한강 작가의 글에는 언제나 ‘죽음에서 삶으로 향하는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지금 우크라이나 사태 등 전 세계적으로 참혹한 비극이 반복되는 상황에서, 이 작품을 통해 사람들에게 의식의 여정을 제안할 이유를 찾았습니다.”
이탈리아 연출가 다리아 데플로리안의 ‘사랑이란 얼마나 끔찍한 고통인가’에는 3명의 배우가 출연한다. 데플로리안은 경하 역으로 직접 출연했다. (c)Christophe Raynaud de Lage, 아비뇽 페스티벌
- 이 연극이 관객들에게 어떻게 닿기를 바라나?
“학살이라는 비극은 무대에서 곧바로 꺼낼 수 없습니다. 귀 기울여 들을 수 있게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무대 위에 눈과 유령, 우정의 기억을 켜켜이 쌓아가며 관객들이 서서히 이야기 안으로 들어오도록 유도했습니다. 오롯이 귀 기울여 주는 관객의 존재가 있어야 완성되는 여정입니다.”
- 한강 작가의 문학이 지닌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인가?
“사적인 폭력과 국가적 폭력을 탁월하게 뒤섞는 점, 신체적 감각을 소름 돋도록 정확하게 묘사하는 능력, 그리고 번역을 거쳐도 고스란히 전달되는 시적인 문학성입니다. 독서라는 경험을 통해 인간의 경험과 감정을 최대한으로 전하고자 하는 한강 작가의 치열한 의도가 느껴지며, 그 안에는 참혹함과 동시에 따뜻한 인간성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아비뇽=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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