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많은 영역에서 사람의 노동력을 대체할 것이란 가설이 정설처럼 굳어지고 있다. AI가 몰고 올 실업과 부의 양극화 등 사회문제를 기본소득이 얼마나 잠재울 수 있을지에도 관심이 모인다.
기본소득을 강조해온 이재명 대통령이 이를 국가 정책에 처음 적용한 형태가 농어촌기본소득이다. 서울과 대도시 중심의 경제발전 전략으로 활력을 잃고, AI 시대에도 변방으로 소외되기 쉬운 농어촌이 기본소득을 실험할 적지라고 판단한 듯하다.
시범사업에 참여하는 전국 10개 군 주민들이 이달부터 농어촌기본소득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한달에 1인당 15만∼20만원씩 지급되는 지역화폐로 지역에서 물건을 사도 되고 서비스를 받아도 좋다. 과거라면, 다른 지역에서라면 없었을 가욋돈이 생긴 것이기에 기분 좋게 지갑을 열 것 같다. 하지만 면 주민들의 표정이 밝지 않다. 읍 주민은 군내 어디서나 이를 사용할 수 있는데, 면 주민은 읍 소재 병원·약국·학원·안경점·영화관을 빼고는 오직 면에서만 쓰게 한 결과다. 정부는 면지역에 돈이 돌면 차차 상점이 생겨 지역경제가 활성화하고 생활 불편도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면 주민들은 “기본소득만 보고 새로운 가게를 차릴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며 “어디서나 편하게 쓰고 싶다”고 입을 모은다.
기본소득은 누구에게나 조건 없이 일정 금액을 꾸준히 지급하는 단순함이 요체다. 농어촌기본소득은 복잡하다. 인구소멸지역, 특히 상권이 없다시피 한 면지역의 경제와 공동체에 활기를 주겠다는 취지는 공감하지만 기본소득의 가치를 희석할 수 있는 꼬리표가 잔뜩 붙었다. ‘주유소·편의점·하나로마트에서는 5만원만 써라’ ‘면 주민은 읍에서 쓰지 마라’ ‘읍 주민은 3개월, 면 주민은 6개월 안에 다 써라’ 하는 지침이 기본소득의 가치를 깎아내리고 있다. 인기 좋은 백화점 상품권도 중고시장에선 5∼6% 감가가 발생한다. 그보다 쓰임새가 제한되는 의류·구두 매장 상품권은 10∼20%까지 가격을 낮춰야 팔린다. 액면가 15만원짜리 기본소득을 시장에서 사고팔 수 있다면 얼마에 거래될까.
사용 제한을 없애면 특정 업소가 블랙홀처럼 기본소득을 빨아들일 것이란 우려도 있다. 여기에 불만을 가질 수는 있어도 손해를 보는 사람은 없다. 확실한 건 사용조건이 단순할수록 주민 만족도가 지금보다 높아지고 기본소득의 가치는 액면가에 좀더 가까워질 것이란 점이다.
농어촌기본소득 시범사업을 한다고 했을 때 다양한 유형의 정책 실험이 전개될 것으로 예상했다. 현행처럼 군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방식 외에도 읍을 제외한 면지역만 적용하거나, 시에 속한 면지역을 따로 묶는 등 사업 범위를 달리해볼 수 있다. 사용처 역시 일정한 제한을 두는 모델과 아무 제약을 두지 않는 모델을 나눠 비교할 수 있고, 지급 수단을 현금과 지역화폐로 달리해 정책 효과를 확인하는 방법도 있다. 시범사업의 목적은 성공이 아니라 설계 검증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처럼 동일한 조건을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방식은 아쉬움을 남긴다.
농어촌기본소득의 본사업 시기는 2028년으로 예고돼 있지만, 2년 만에 수조원대 사업으로 전면화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결국 확대 과정에서 정책방향을 다듬게 될 가능성이 크다. 더 과감한 실험으로 규제를 줄이고 최대한 단순화한 모델을 도출할 필요가 있다. 기본소득의 힘은 고상한 취지나 복잡한 설계가 아니라 단순함에서 나온다. 농어촌기본소득도 단순할수록 좋다.
홍경진 정경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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