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선형 산업부 차장
세계 경제의 작동 원리가 근본적으로 재편되고 있다. 시장의 자정 작용에 미래를 맡기던 시대는 끝났고 국가가 직접 산업의 배후에서 자금과 규제를 컨트롤하며 승패를 결정짓는 재정 자본주의의 시대가 된 것이다. 일본, 중국이 자국 공급망을 위해 천문학적 보조금을 쏟아붓는 사이 우리 정부도 대응 수위를 높이고 있다.
정부가 꺼내 든 카드는 이른바 산업별 특별법 드라이브다. 반도체에서 석유화학, 인공지능(AI)데이터센터, 소형모듈원전(SMR)에 이르기까지 규제의 빗장을 풀고 지원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겠다는 특별법들이 연이어 예고되고 있다.
이번주 본격 시행에 들어가는 석유화학 특별법은 그동안 공급과잉의 늪에서 허덕이던 업계에 반가운 소식이다. 지난 14일 국무회의를 통과한 이번 시행령은 기업 간 설비 통합이나 법인 신설 시 겪어야 했던 행정적 병목을 걷어내고 공정거래법상의 담합 규제 예외까지 인정해주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범용 제품 위주의 한계를 벗어나 고부가가치 첨단소재로 전환하려는 기업들에 속도전의 명분을 준 셈이다. 여기에 인공지능데이터센터 특별법을 통한 전력 직접 구매(PPA) 허용과 반도체 직접 보조금 논의까지 더해지며 산업계 전반에는 판 재편에 대한 기대감이 교차하고 있다.
다만 이 같은 특별법 정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장밋빛 일색인 것만은 아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법안의 화려함에 비해 실질적인 디테일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큰 우려는 정부의 대응 방식이 글로벌 트렌드인 직접 보조금보다는 여전히 규제 완화와 세제 혜택이라는 간접 지원의 틀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최근 경영자총협회 조사에서 기업의 42.3%가 대규모 직접 투자 지원을 1순위 과제로 꼽은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시선을 밖으로 돌리면 상황은 더 냉혹하다. 일본이 파운드리 자국 생산을 위해 수조 원의 현금을 살포하는 상황에서 우리만의 특별법이 글로벌 경쟁사들과의 체급 차이를 얼마나 극복해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또 특별법이 담고 있는 사업재편의 실효성 문제도 넘어야 할 산이다. 석유화학 업계의 사례처럼 법적 근거가 마련돼도 기업 간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면 재편은 공전할 가능성이 높다. 나프타분해시설(NCC) 감축 규모나 자산 가치 평가를 두고 벌어지는 민간 기업 간의 수 싸움에 정부의 특별법이 강제력을 갖기란 쉽지 않아서다. 자칫 특별법이 기업들에 버티기 시간을 벌어주는 명분으로 전락하거나 혜택만 챙기고 실질적인 구조조정은 뒤로 미루는 도덕적 해이를 불러올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특별법 남발이 오히려 규제의 일상화를 고착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상시적인 법체계 내에서 해결하지 못해 매번 특별한 법을 만들어야만 산업이 작동하는 구조라면 이는 우리 규제 시스템의 근본적인 결함을 자인하는 것과 다름없다. KDI 등 국책연구기관들이 단선적 지원의 한계를 지적하며 정교한 정책 조합을 주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시적인 특례가 끝난 뒤 기업들이 다시 규제의 벽에 부딪힐 때 우리는 또 다른 특별법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
결국 지금 필요한 것은 특별법이라는 이름의 일시적 정책이 아니라 산업 생태계 전체의 체질을 바꾸는 긴 호흡의 전략이다. 특별법이 단순히 기업의 민원을 해결해주는 통로가 아니라 글로벌 시장의 변화에 맞춘 국가 전략의 마중물이 되기 위해서는 현장의 목소리를 더 세밀하게 담아낼 집행 과정에서의 정교함이 요구된다. 법은 길을 터줄 뿐 그 길을 달리는 것은 결국 기업의 몫이기 때문이다.
정부의 이번 드라이브가 훗날 K-산업 재건의 변곡점이 될지 아니면 위기를 덮기 위한 수사적 장치로 남을지는 이제부터 시작될 집행의 속도와 정교함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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