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삼수 서울본부장
일본이 또 역사의 시계를 되돌렸다. 최근 일본 참의원(상원)을 통과한 ‘황실전범(皇室典範, 일본 왕실의 계승 순위와 구성, 법적 지위를 규정한 법률)’ 개정안 얘기다.
다카이치 총리와 자민당은 며칠 전, ‘여성 천황’은 계속 금지하고, 2차대전 패전 후 황족 신분을 잃은 옛 황족 남성을 입양하도록 황실기본법을 개정했다. 겉으로 내세운 이유는 “왕족 수가 너무 적다”는 것.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답은 뻔하다. 국민들이 좋아하는 아이코 공주는 여자라는 이유로 배제하고, 대신 600년 전 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겨우 만나는 ‘36촌 아저씨’를 양자로 들여서라도 왕위를 잇게 하겠다는 거다.
36촌이면 사실상 남남에 가까운데, 그래도 ‘남자’라는 이유 하나로 공주보다 우선순위에 놓인 셈이다. 그런데 이 법을 밀어붙인 다카이치 총리, 정작 본인이 일본 역사상 첫 여성 총리다. 나라를 실제로 움직이는 총리 자리는 여성이 앉아도 되는데, 상징적인 자리인 일왕은 “여자는 절대 안 된다”는 거다.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심지어 일본 국민 70% 이상이 ‘여성 일왕’ 찬성이라는 데도, 정치권은 국민 뜻은 뒤로 하고 옛날 왕족의 먼 친척 남자를 찾아 헤매는 촌극을 벌였다.
정작 이 법을 통과시킨 여당의 허를 찌른 건 다름 아닌 일본 언론이었다. 요미우리, 니혼게이자이, 아사히, 마이니치 등 일본 주요 신문이 일제히 대서특필하며 비판 사설을 쏟아냈는데, 그중에서도 대표적 보수언론 요미우리신문의 반응이 압권이다. ‘상징적 천황제의 근간에 상처를 입혔다’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전후 80년에 걸쳐 자라온 국민과 상징적 천황의 유대를 무시하는, 너무 많은 결함을 안은 난폭한 제도 변경”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평소 우호적이던 보수 매체마저 등을 돌렸으니, 여당 입장에서는 아군에게 뼈아픈 일격을 당한 셈이다. 아사히신문은 한술 더 떠 나루히토 일왕이 최근 “국민의 이해를 얻는 논의가 이뤄지길 바란다”고 밝힌 발언까지 인용하며, 국민 70%가 지지하는 여성 계승 논의를 정치권이 통째로 무시했다고 꼬집었다. 정작 당사자인 일왕조차 에둘러 불만을 표한 셈이니, 이쯤 되면 누구를 위한 개정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세계로 눈을 돌리면 더 초라해진다. 영국은 16세기 엘리자베스 1세부터 최근까지, 무려 70년을 재위한 엘리자베스 2세까지 여왕들이 나라를 잘만 이끌었다. 스페인, 네덜란드, 스웨덴 같은 유럽 왕실은 이미 “성별 상관없이 첫째가 계승”하는 방식으로 정리를 끝냈다. 그런데 일본은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가 문제 제기를 해도 “왕위 계승은 인권 문제가 아니다”라는 궤변으로 맞받아쳤다.
이러한 억지 혈통주의는 역사의 데자뷔를 떠올리게 한다. 조선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적통 남자를 고집하다 대가 끊길 위기가 오면 철종, 고종처럼 먼 친척을 데려다 억지로 왕을 만들었고, 그 결과는 세도정치와 국력 쇠퇴였다. 600년 전 조상을 공유하는 남자를 찾아 혈통을 이어붙이려는 지금 일본의 모습이, 조선 말기와 놀랍도록 겹친다.
결국 변화를 거부하고 시대의 가치인 남녀평등마저 외면한 대가는 스스로 치르게 돼 있다. 황실이 국민과 더 가까워질 좋은 기회를 걷어차 버린 일본 정치권은 지금 거센 역풍을 맞고 있고, 총리 지지율도 40%대로 뚝뚝 떨어지는 중이다. 여성 천황을 배제하고 옛 황족을 입양해 남성 승계를 이어가려는 무리수가 결국 정권 존립 자체를 흔드는 악수가 되었다.
‘전통’이라는 간판 뒤에 숨어 불합리와 차별을 지켜낸 이번 사태는, 시대의 가치를 외면한 권력이 어떻게 스스로 무너지는지 잘 보여준다. 특히 딸·아들 구별 없이 귀하게 키우는 요즘 세상에,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기회를 박탈하는 모습은 딸을 키우는 부모들의 가슴에 거센 분노와 씁쓸함 만을 남긴다.
얼마 전 월드컵에서 우리보다 한 수 위의 경기력을 선보인 일본 축구를 보며 내심 부럽기도 하고 우리 축구에 억장이 무너졌던, 그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다. 축구 실력은 부럽지만, 여전히 남성 우월주의에 갇혀 있는 그들의 시대 감각은 참으로 딱하다.
우리 사회도 하루가 멀다 하고 어이없는 일이 터지지만, 이번 퇴행이 우리 집 울타리 밖 이웃 나라 일이라는 점 만은 작은 위안이다.
윤삼수 서울본부장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