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전쟁 시대 '깃털'처럼 가벼워진 KAIST 총장 자리
'멈춤'의 미학 없는 과학계 인사, 미래 인재들에 어떤 교훈?
인사권자인 이 대통령 현실 알까?···비서진, 제대로 된 보좌 필요
중국, 자립자강 목표로 백년 전략 설정···국난 위기의식 긴요
연구회 및 연구재단 거버넌스도 고민해야
이광형 총장 퇴임이 한차례 연기 후 번복됐다. 후임총장 인선때까지 무기한 연기된다. 이사회의 요청을 수용한 것으로 보이지만 손바닥 뒤집듯 말이 바뀌는 상황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재명 정부가 과학기술을 국정 최우선에 두겠다고 했지만 지금 인사를 보면 그 과학기술인사의 무게가 잘 전달되지 않는 듯하다. 총장 개인의 처신도 문제지만, 본질은 인사권을 쥔 곳에 있다. 인사권자, 보좌진, 과학계 스스로 절박하게 위기의식을 가지고 꼬인 스텝을 바로잡아야한다. [사진=대덕넷 DB]
천금의 무게를 지녀야 할 KAIST 총장 자리가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임기가 끝난 총장은 사의를 표했으나, 대책도 세우지 못한 채 총장 선임 이사회를 무산시킨 당사자들이 만류에 나서는 블랙 코미디가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다.
경위는 이렇다. 이광형 총장은 지난달 26일 이사회가 끝나자마자 사표를 냈고 수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퇴임식은 3월 9일로 잡혔다. 그런데 석연찮은 이유로 16일로 연기됐고, 그것마저 후임 총장 인선 때까지 무기한 연기되는 처지가 됐다. 이 모든 일이 불과 15일 사이 벌어졌다.
KAIST 총장 선임 지연은 이미 1년 가까이 이어져 왔다. 이번 번복은 이 총장 개인의 의사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총장이 물러나 공백이 생긴다면 의사결정과 대외 조정 기능이 약화돼 조직 운영의 안정성이 흔들릴 수 있으니 차기 총장 선임시까지 직무를 수행해달라는 이사회의 요청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총장은 이미 같은 이사회에 만류에도 이미 사임서를 제출했었다. 손바닥 뒤집듯 말이 바뀌는 이 상황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이 의아함으로 가득하다. 과학전쟁 시대에 이런 모습이라니.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이런 상황에서 과학이 제대로 대한민국을 책임질 수 있겠느냐는 탄식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KAIST 총장 자리가 깃털처럼 가벼운 자리도 아닌데, 너무 쉽게 번복되는 모양새에 구성원으로서 부끄럽다."
이 와중에 KAIST 내부에서 흘러나온 목소리 하나가 뼈를 찌른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비단 KAIST 구성원만이 아닐 것이다. 지금 이 장면을 지켜보는 미래 세대는 무엇을 배우고 있을까. 리더십에는 원칙이 있어야 하고, 자리에는 무게가 있어야 하며, 한 번 뱉은 말에는 책임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할 어른들이 정작 스스로 그것을 허물고 있다. '멈춤의 미학'이 실종된 과학계 인사가 미래 인재들에게 남기는 교훈치고는 너무나 초라하다.
문제의 뿌리는 어디인가. 총장 개인의 처신도 문제지만, 본질은 인사권을 쥔 곳에 있다. 대통령실이고 더 나아가면 인사의 최종 책임자인 이재명 대통령이다. 이런 국책 기관·대학의 수장 인사는 통상 해당 부처와 청와대 관련 수석·비서관 사이에서 충분한 교감이 오간 뒤 최종 의사결정자에게 올라가는 법이다. 그 사전 조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방증이 지금의 파열음이다.
보좌하는 이들이 제 역할을 못한 것이고, 그 결과는 결국 대통령에게도 누가 된다. 이재명 정부가 과학기술을 국정 최우선에 두겠다고 했다면, 그 의지가 인사에서 가장 먼저 드러나야 한다. 대통령은 지금 이 현실을 제대로 보고받고 있는 것인지, 비서진은 과학기술 인사의 무게를 대통령에게 충분히 전달하고 있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재명式 과학기술 인사가 실용인지 실수인지는 아직 판정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흘러나오는 파열음들을 보면 과학이 후순위로 밀려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대통령실은 이번 KAIST 일에 크게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도 들러온다. 문제는 이것이 KAIST 하나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가 과학 거버넌스의 핵심 기관인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와 연구비 배분을 총괄하는 한국연구재단의 기관장 인사도 같은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 국가 과학기술 전략과 일체화될 수 있는 인물이 그 자리를 맡아야 한다.
출연연 원장 인사도 마찬가지다. 한국한의학연구원(2024년 4월 8일) 원장 공백은 2년이 다 되어간다. 여기에 한국전자통신연구원(2025년 12월 13일), 한국원자력연구원(2025년 12월 13일 ), 한국전기연구원(2026년 1월 12일)까지 인사가 계속 지연 중이다. 우리에게는 과거를 보고 하는 인사가 아니라, 미래를 보고 하는 인사가 지금 절실하다.
KAIST 총장 자리 하나를 둘러싸고 자중지란을 거듭하는 사이 중국은 최근15차 5개년 계획 강요를 공식 발표했다. 넓은 국토에 맞춰 과학기술 거점을 조성하고 이를 하나의 전략적 네트워크로 묶어 국가 전체를 기초과학과 산업을 잇는 기반으로 만들겠다는 장기적 과학기술 국가전략 등을 내세우고 있다. 백년을 내다보는 국가 전략의 뼈대를 세우는 중국과, 과학전체의 신뢰와 위엄이 무너진 한국. 우리는 어떤 미래를 기대할 수있을까. [한중과학기술협력센터 이슈리포트]
시선을 서쪽으로 돌리면 착잡함은 배가 된다. 중국은 양회를 마무리하며 15차 5개년 계획 강요를 공식 발표했다. 2년여에 걸친 치밀한 의견 수렴 끝에 내놓은 이 계획은 그 어느 때보다 과학기술에 방점이 찍혀 있다. AI·양자·핵융합·바이오·뇌과학·심해·심우주 등 8개 미래 기술 분야에 국가 역량을 집중하고 과학기술 자립자강을 통한 강국 등극을 최우선 목표로 못 박았다.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오랜 시간 기민하게 역량을 축적하며 차근차근 실행해 온 중국의 정책 추진력이 돋보인다. 특히 넓은 국토에 맞춰 과학기술 거점을 조성하고 이를 하나의 전략적 네트워크로 묶어 국가 전체를 기초과학과 산업을 잇는 기반으로 만들겠다는 장기적 과학기술 국가전략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5개년 계획은 과거에도 그랬듯 정권 변화와 상관없이 국가 전략 연속성을 유지하며 수행될 것으로 기대된다. 공산당체제여서 가능한 일이라고 치부하기엔 기술전략이 국가정책 전체와 연결되도록 정책과-연구-산업을 연계하고자 하는 지도자의 의지가 너무나도 잘 읽힌다. 시진핑 주석의 복심 딩쉐샹 부주석을 과학기술 정책의 최고 결정권자로 세우고, 당이 전략 전권을 행사하되 현장 연구자에게는 자금 통제권과 기술 노선 결정권을 폭넓게 부여하는 구조. 이것은 단순한 5년짜리 계획이 아니다. 백년을 내다보는 국가 전략의 뼈대다.
한국보다 자원이 넘치는 중국이 이처럼 빈틈없이 전열을 정비하고 내달리고 있다. 그 앞에서 대한민국은 KAIST 총장 자리 하나를 둘러싸고 자중지란을 거듭하고 있다.
중국의 움직임을 보면 머지않아 우리에게 큰 위기가 닥칠 가능성이 크다. 지금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위기의식을 갖고 미래에 대비해야 한다. 그 위기의식이 인사권자에게, 보좌진에게, 그리고 과학계 스스로에게 절박하게 요구된다.
노자 《도덕경》은 일렀다. 知足不辱, 知止不殆(지족불욕, 지지불태). 만족할 줄 알면 욕을 당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자리에 있는 사람도, 보좌하는 사람도, 인사권자도 각자의 위치에서 나아갈 때와 멈출 때를 분별해야 한다. KAIST 총장 자리가 깃털처럼 가벼워지면 과학정책 전체의 신뢰와 위엄이 함께 무너진다. 인사는 메시지다. 지금 그 메시지가 너무 흐릿하다.
스텝이 꼬였다면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한다. 방관이 가져올 후폭풍이 더 크다는 것을 우리는 여러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차기 KAIST 총장 선임을 투명하고 신속하게, 그리고 미래를 향해 마무리하는 것이 첫 번째 시험대다. 대통령이 직접 과학기술에 비례하는 관심과 의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이 이재명式 실용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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