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주목하는 정유미 감독
루이즈 부르주아 작품 속 문구
정유미 감독. 매치컷 제공
대학에 들어가 처음 알게 된 작가 중 한 명이 루이즈 부르주아였다. 어린 시절의 기억과 상처, 가족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설치와 조각, 드로잉으로 끊임없이 표현해 온 작가. 그녀의 작품 속 상처는 너무나 생생했다.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했고, 자신의 가장 사적인 기억과 감정을 숨기거나 완화하지 않고 그대로 꺼내놓는 듯했다. 나는 그렇게 자신의 상처를 평생에 걸쳐 작품으로 만들어온 작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몇 년 전, ‘하루의 사랑 작업’을 쓴 하루님의 소개를 통해 부르주아의 한 작품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천 위에 바느질로 이런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I have been to hell and back. And let me tell you, it was wonderful.”
“나는 지옥에 다녀왔다. 그리고 돌아왔다. 그런데 말해두자면, 그곳은 환상적이었다.”
이 문장을 처음 보았을 때 이상할 만큼 큰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때까지 내가 부르주아의 작업 세계를 충분히 알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동안 그녀가 자신의 상처를 끊임없이 들여다보고 작품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치유되었으리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이 짧은 문장에서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은 수용이 느껴졌다. 자신의 아픔을 피하지 않고 가감 없이 바라보고, 평생에 걸쳐 그것을 작업으로 통과해 온 예술가가 결국 그 모든 아픔까지 수용한, 자유로운 모습 같았다.
도쿄 모리미술관에 전시됐던 루이즈 부르주아 작품. 이우영 기자 verdad@busan.com
우리는 슬픔과 아픔, 고통 같은 부정적인 감정과 경험에서 가능한 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 시간에 오래 머물게 될까 두려워하고 끊임없이 저항한다. 당연히 누구도 그런 시간을 좋아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시간을 지나며 이전에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자신의 모습, 사랑할 수 없어 버려두었던 자신의 일부를 발견하고 만나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고 안아줄 수 있게 되었을 때, 지나온 시간의 의미도 달라질 수 있다.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지금의 내가 달라지면 과거 역시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남게 된다.
그토록 오랫동안 자신의 상처를 바라보고, 그 모든 아픔을 통과해 온 사람이 자신의 지옥을 돌아보며 “환상적이었다”고 말한다. 내게는 그 말이 지나온 모든 것에 이제는 다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처럼 들렸다. 큰 위로였다.
그래서 힘든 시간을 지날 때면 가끔 이 문장을 떠올린다. 언젠가 나 역시 내가 지나온 모든 시간을 돌아보며, 환상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정유미 영화감독
이우영 기자 verdad@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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