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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과학

[김재인의 피지컬 vs 디지털]우리의 읽기 근육에 근손실이 오고 있다

‘인공지능(AI)이 잘 요약해주는데 직접 읽어야 하나요?’ ‘AI가 잘 번역해주는데 외국어를 굳이 배울 필요가 있나요?’ 최근에 많이 받는 두 가지 질문이다. 나는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AI가 정확히 요약했는지 어떻게 알지요?” “AI가 잘못 번역했는지 가려낼 수 있나요?”

오늘날 트럼프식 소통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다

가볍고도 변덕이 심하다 길고, 무겁고, 복잡하고, 어려운 글을

음미하는 건 찾아보기 힘들다. 읽기는 민주주의가 올바로 작동하기 위한 근간

오늘날 정치적 파행은 읽기의 쇠퇴가 가져온 결과 중 하나다

디지털화가 가속하면서 인간의 읽기는 약화됐다

본격적 읽기를 외면할수록 우리의 읽기 근육에는 근손실이 온다

‘인공지능(AI)이 잘 요약해주는데 직접 읽어야 하나요?’ ‘AI가 잘 번역해주는데 외국어를 굳이 배울 필요가 있나요?’ 최근에 많이 받는 두 가지 질문이다. 나는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AI가 정확히 요약했는지 어떻게 알지요?” “AI가 잘못 번역했는지 가려낼 수 있나요?”

이런 문답 속에는 ‘읽기’가 인간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오해가 담겨 있다. 자신의 읽기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요약이나 번역에서 이상한 대목을 찾아내지 못한다. 필요할 때 원자료를 충분히 검증하지도 못한다. 원자료에 숨어 있는 중요한 통찰을 얻을 기회도 활용하지 못한다.

더욱이 읽기 활동은 그 자체로 읽기 근육을 성장시키는 운동이다. 읽기 실력에는 등급이 있다. 읽기 실력이 높을수록 같은 자료에서 더 깊이, 더 꼼꼼하게, 더 많이 얻는다. 같은 시간 동안 읽더라도 시간 대비 효율, 즉 ‘시성비’가 높아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읽기 근육은 읽으면 읽을수록 튼튼해지고, 읽지 않으면 물러진다.

생성형 AI가 등장하기 전부터도 사람들은 ‘읽기’를 점점 경시했으며, 사람들의 ‘읽기 실력’도 낮아져왔다. 이는 많은 증거로 뒷받침된다. ‘명징하게 직조해낸’ ‘심심한 사과’ ‘사흘’ ‘금일’ ‘중식’ 등 잊을 만하면 소환되는 논란을 다시 꺼내려는 건 아니다. 그간 이 논란은 ‘문해력(文解力)’과 연관돼 논의되었다. 문해력은 영어 리터러시(literacy)에 대응하는 말로, 영어와 한국어 용법 사이에 간극이 매우 큰 용어이다. 문제의 본질이 가려지게 된 원인이다.

리터러시는 라틴어 리테라(littera, 영어의 letter)에서 유래한 말로 ‘문자’를 구사하는 능력, 즉 ‘읽고 쓰는 능력’을 가리킨다. 따라서 우리말로 직역하면 ‘문자력’이다. 근래에는 ‘미디어 리터러시’ ‘금융 리터러시’ ‘디지털 리터러시’ ‘AI 리터러시’ 등 의미가 과잉 확대돼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미디어 리터러시 강화’ 대신 ‘미디어 교육 강화’라고 쓰면 좋겠다는 이재명 대통령의 지적도 일리가 있다.

리터러시의 번역어로는 ‘문식력(文識力)’ ‘문식성(文識性)’ ‘문해력’ 등이 경합하다가 최근에는 ‘문해력’으로 자리 잡았다. 학술연구정보서비스(RISS)를 살펴보면 2022년부터 학술논문에 사용된 빈도가 급증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2021년 EBS가 방송한 <당신의 문해력>이 용어가 정착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 용례를 보면 ‘문해력’은 ‘독해력’ 혹은 더 좁게는 ‘어휘력’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앞서 소개한 ‘명징’ ‘심심한 사과’ ‘금일’ 등의 논란이 대체로 ‘문해력’의 문제로 다뤄졌지만, 실제로는 ‘어휘력’과 ‘독해력’을 둘러싼 논의일 뿐 ‘쓰는 능력’과 연관 짓는 논의는 별로 없다는 점이 이를 입증한다. 이런 점에서 리터러시를 ‘문해력’ 대신 ‘문자력’으로 옮기면 오해가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번역어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해력’ 논란이 ‘문자력’의 위기를 은폐하는 방식으로 소비된다는 데 있다. ‘젊은 세대의 문해력이 떨어진다’거나 ‘어떤 세대건 익숙한 언어는 서로 다르다’는 수준에서만 논의가 맴돌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정작 문자력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는 간과되었다.

오늘날 읽기의 쇠락 점점 가속

언어는 입말인 구어와 글인 문어로 나뉜다. 구어는 듣기와 말하기로, 문어는 읽기와 쓰기로 세분된다. 듣기와 읽기는 ‘입력’ 및 ‘습득’과 관계된다. 즉, 외부의 정보와 기술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활동이다. 말하기와 쓰기는 ‘출력’ 및 ‘표현’ 활동으로, 이미 내 것이 된 것을 ‘우리 모두’의 것으로 만든다. 언어력은 이 네 가지 언어 구사 능력이다. 이 중 가장 먼저 위기에 처한 것은 읽기이다.

입말인 구어는 타고난 능력으로, 인간이라면 18개월쯤부터 누구나 자연스레 구사할 수 있다. 굳이 애써서 배우려고 하지 않아도 습득된다는 뜻이다. 반면, 문자는 약 5300년 전에 인류가 발명해낸 기술이다. 문자를 굳이 ‘기술’이라고 표현한 까닭은, 그것이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힘겹게 애써 노력해야 겨우 획득할 수 있는 실력이기 때문이다. 5300여년은 진화에 따른 유전자 변화가 일어나기에 너무 짧은 시간이고, 따라서 문자는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익힐 수밖에 없다.

읽기를 소리 내어 발음하기로 오해하면 안 된다. 읽기는 서양의 전통적 분류에 따르면 ‘문법과 논리’, 즉 내용의 1차적 의미를 이해하면서 비판적으로 따지는 과정 전체를 지칭한다. 따라서 세밀하고 깊게 읽기 위한 지속적인 훈련이 반드시 필요한데, 이는 문학·역사·철학 등 길고 묵직한 문헌을 강독하면서 가장 잘 익힐 수 있다. 이런 읽기 훈련은 어렵고 귀찮으므로 꺼리게 되었고, 궁극적으로 읽기에 대한 오해와 경시를 낳았다.

문자의 역할은 일찍이 월터 옹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서도 강조된 바 있다. 구어는 개인의 기억과 발화되는 시간 동안의 소리에 갇힐 수밖에 없다. 반면 문자는 개인 바깥의 공동 공간에 누구나 볼 수 있게 펼쳐지며 매체가 지속하는 한 영속한다. 이처럼 개인의 뇌 바깥에 외화될 수 있다는 특성 때문에 문자는 객관적 분석, 비교, 비판, 성찰을 가능하게 했고 철학·역사학·과학·비평을 낳았다. 다만 문자의 힘이 유지되려면 문자력을 잃지 않으려는 개개인의 고된 노력도 거듭돼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읽기의 쇠락은 점점 가속하고 있다. ‘애틀랜틱’(2026년 8월호)에 수록된 로즈 호로위치의 “읽기 시대의 종말(The Age of Reading Is over)”은 이 문제에 대한 최신 보고이다. 이 보고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연령·성별·교육 수준을 막론하고 읽기 및 읽기 실력의 쇠퇴가 관찰되고 있다. 하버드대 인문사회과학 지원실의 마거릿 레닉스 부국장에 따르면, 미국 최고급 명문대 학생조차도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동영상이나 요약문이 아닌) 글을 읽도록 요구하는 것은, 더 어려운 매체를 통해 정보를 얻도록 강요함으로써 학생들이 정보에 접근하는 것을 제멋대로 막는 것”이라고 인식한다. 발췌문이나 요약문이 지니고 있지 못한 원전의 깊이와 정교함을 모르기 때문에 생겨난 일이다. 이런 현상은 디지털 기기의 보급, 책 전체보다 짧은 발췌문을 선호하는 교육, 소셜미디어 및 쇼트폼 영상 소비, 생성형 AI의 등장으로 점점 가속되었다.

읽지 않아도 된다는 발상은 잘못

읽기의 쇠락이 가져온 더 큰 부정적 함의는 정치·사회 영역에서 관찰된다. 호로위치는 도널드 트럼프를 미국 최초의 탈문자(postliterate) 대통령이라고 진단한다. 트럼프의 소통 방식은 구술 사회에 완벽하게 어울린다. 가령 한 게시물은 미국 군함이 레이저로 이란 항공기를 명중시키는 그림과 함께 “레이저: 빙, 빙, 끝!!!”이라는 문구만 담고 있다. 이것이 읽기가 사라진 시대의 소통 방식을 대표한다. 2024년 NBC 뉴스는 10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했는데 신문을 읽는 응답자 사이에서 조 바이든이 트럼프를 49%포인트 앞섰다고 한다. 실제로 글이 소통의 중심에 있었다면,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선출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읽기는 민주주의가 올바로 작동하기 위한 근간이며, 오늘날 전 세계적인 정치적 파행은 읽기의 쇠퇴가 가져온 결과 중 하나다.

오늘날 트럼프식 소통이 우리 삶을 온통 지배하고 있다. 가볍고도 변덕이 심하다. 길고, 무겁고, 복잡하고, 어려운 글을 천천히 음미하는 일은 찾아보기 힘들다. 디지털화가 가속하면서 인간의 읽기는 약화했다. 더욱이 AI가 자료를 조사하고 요약하고 정리할 수 있다는 믿음과 함께 읽지 않아도 된다는 믿음 또한 확산했다. 그러나 이것은 틀렸다. 본격적인 읽기를 외면할수록 우리의 읽기 근육에는 근손실이 온다. 최소한 현상 유지를 위해서라도 읽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사실 읽기와 쓰기는 서로를 전제한다. 읽기의 이면에는 반드시 쓰기가 있다. 다만 모든 사람에게 읽기보다 쓰기가 어렵다는 건 분명하다. 그래서 쓰기보다 먼저 읽기를 살폈다. 하지만 문자력에 쓰기가 포함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김재인 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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