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재위 기간 강릉에 살던 20세의 처자 초정(草井)은 이 생원 댁에 자신을 팔아
'스스로 팔았다'는 자매(自賣) 명문화 … 일가의 자손 친족까지 노비 방매도 약속
민초의 눈물과 한숨은 명군과 명신,빛나는 성취와 문화도 닦을 수 없음을 알게 돼
역사란 명군과 명신, 빛나는 성취와 문화로만 이루진 것이 아니다.
역사책을 뒤적이다 보면 '투탁(投託)'이란 말을 만날 때가 있다. 여러 가지 뜻 중에, '영락 또는 파산한 농민이 스스로 토호나 지주의 노비로 파는 일'이란 뜻이 있는 말이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싶으면서도 피부에 와닿지는 않았다. 그런데 『고문서에 담긴 삶의 조건들』(권이선 외 지음,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에서 생생한 실례를 접했다. 「1758년 초정의 자매명문, 세 가지 이야기」에서다.
1758년이면 조선의 중흥을 이끌었다 해서 호평받는 영조의 재위 기간이다. 강릉 살던 20세의 처자 초정(草井)은 이 생원 댁에 자신을 팔았다. 자신을 스스로 판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으니 이것이 '스스로 팔았다'는 자매(自賣) 명문이다. 여기엔 단순히 '소유권' 이전 사실만이 아니라 그 기구한 사연이 담겼다.
이태 연속 흉년이 들어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났는데 초정은 부모의 장례를 치를 비용을 마련할 길이 없는 처지였다. 게다가 아비가 생전에 부담했던 군포(軍布)며 백골번포(죽은 후에도 번역 대신 내야 했던 일종의 세금) 납부에 시달렸다. 급기야 초정은 이 생원 댁에 15냥에 자신을 방매(放賣)해 노비 신분으로 전락했다.
초정은 그 시대 평민 여성의 그렇듯 글을 몰라서 문서에 자기 이름을 쓰는 대신 손바닥 그림으로 수결을 했는데 여기에 초정의 삼촌에 입양된 양사촌 양선만이 증인으로 이름을 올렸으니 오늘날 기준으로 봐도 제법 문서꼴을 갖춘 셈이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초정 관련 문서가 이것 말고도 두 건이 더 있는데 그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다. 하나는 초정이 10여 세 무렵 구걸을 다니던 중 이 생원 댁을 지나는데 "자녀가 없어 아이를 노비로 거두어 길렀다"는 내용이다. 아니, 자녀가 없는데 노비로 거뒀다는 명분도 미심쩍지만 다른 문서 내용은 더 기막히다. 양사촌 양선만이 초정을 찾아와 "네 아비의 백골번포를 내가 대신 납부했으니 앞으로 네가 이를 책임지고 갚아야 한다"고 채근했다니 말이다. 견디다 못한 초정은 자신을 방매한 뒤 받은 15냥 중 10냥은 양선만에게 주고, 1냥은 5촌 숙부 김삼룡에게 지급했으며 나머지 돈으로 부모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이 정도만 해도 눈살이 찌푸려지는데 더 심한 것은 자매명문에 붙은 단서다. "자신의 후소생을 함께 영영 방매하오니, 후일 일가 자손 친족이 다른 말을 하거든 이 문서로써 관에 고하여 바로잡을 것"이라 하여 자신뿐 아니라 후손에게까지 족쇄를 채우는 내용이었다.
이를 보면 역사란 명군과 명신, 빛나는 성취와 문화로만 이루진 것이 아니란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 이처럼 이름 없는 민초들의 눈물과 한숨 또한 역사의 한 부분이라면 오늘날 우리의 삶은 훗날 어떤 그림으로 남게 될지 궁금해진다.
이코노텔링 김성희 편집고문 커리커처.
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
김성희 이코노텔링 편집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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