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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김선욱의 LOOKBOOK] 인생은 어차피 ‘아는 맛’의 연속이다

(사진=네이버 캡쳐)

[김선욱의 LOOKBOOK] 인생은 어차피 ‘아는 맛’의 연속이다

딸 아이가 첫돌이 되기 전 찍은 영상 중 흥미로운 것이 있다.

생후 5개월의 딸이 처음으로 귤을 먹는 장면이다.

으깬 귤즙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다가, 꿀꺽 삼키고는 처음 맛보는 새콤달콤함에 몸을 부르르 떠는 모습이 담겨있다. 나는 이 영상을 수시로 본다. 이 장면이 유독 흥미로운 이유는, 갓 태어난 아기의 뇌 속에서 일어나는 뉴런들의 시냅스 연결을 눈으로 확인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인간이 무언가를 처음 경험했을 때, 뇌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이 장면에 고스란히 찍혀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을 한다.

‘내 인생에도 아직 상상해본 적 없는, 신세계가 열릴 원체험이라는 것이 남아있을까?’

짐승은 태어나자마자 스스로 걸을 수 있지만, 갓 태어난 아기는 목도 가누지 못한다.

뇌과학자들은 이것이 인간의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라고 설명한다.

말하자면, 짐승은 뇌 속의 배선 작업이 거의 완료된 채 태어나기 때문에 삶에 필요한 기능 대부분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불행히도 이는 출생 직후 생애 거의 모든 가능성이 닫힌 채 삶을 유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태어나면서 지닌 기능에 한정된 삶을, 죽을 때까지 반복하면서 산다는 설명이다.

반면 인간은, 환경에 따라 뇌 속 뉴런들의 연결이 어떤 형태로 이뤄질지 모르는 가소성(可塑性)을 지녔기에, 개인의 경험에 따라 존재의 기능이 무한대에 가깝다는 것이다.

혼자서는 밥을 먹지도 못하는 인간이 어떻게 이 행성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설명이다. 자긍심과 미래에 대한 기대까지 창출하는 과학적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한 자연인의 인생 면면이 과학적일 수는 없다는 점이다.

누구나 종종 견디기 힘든 권태를 만난다.

생활의 양태가 다양해졌다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소시민은 같은 사회적 자장 안에서 규칙을 지키고, 저마다의 걱정을 한아름씩 안은 채 반복되는 생업을 견디고, 이따금의 이벤트로 삶을 지탱한다.

인간 뇌 속의 뉴런이 1천억 개라는데, 심지어 그 모든 뉴런들이 다시 각각 1만 번의 연결을 이룬다고 하는데, 그 거대한 연결망에도 불구하고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내게 압도감을 줄 그 어떤 인생의 원체험도 더는 없을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매일 아침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킬 만큼, 강력한 일상의 동기가 될 뇌 속에 새로운 배선 작업은 다 큰 어른에게 욕심일까.

<아기의 뇌에서는 매초마다 무려 200만 개의 새로운 연결, 곧 시냅스가 형성된다. 두 살이 된 아기는 100조 개가 넘는 시냅스를 가졌다. 이 시점에서 새로운 연결들의 만발 대신에 신경학적 ‘가지치기’가 새로운 전략으로 채택된다. 당신이 성숙하는 동안, 당신이 가진 시냅스들의 50퍼센트가 감축된다. 어떤 시냅스들이 제거되고, 어떤 시냅스들이 남을까? 회로에 성공적으로 참여하는 시냅스는 강화된다. 반대로 불필요한 시냅스는 약화되고 결국 제거된다. 숲속의 오솔길들과 마찬가지로, 사용되지 않는 연결들은 소멸한다. 어떤 의미에서 당신이 지금의 당신으로 되는 과정은 이미 있었던 가능성들을 쳐내는 과정이다. 당신이 지금의 당신으로 된 것은 당신의 뇌 속에서 무언가가 성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가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유년기 내내 우리의 국소적 환경이 우리의 뇌를 다듬고, 가능성들의 밀림이었던 뇌를 환경에 적합한 모습으로 되돌려 결국 뇌 속 연결들을 더 적고 강해지게 만든 결과가 지금의 당신이다.>

_『더 브레인』 / 데이비드 이글먼 / 해나무(2017)

고작 40년을 살아놓고 거시적 인생을 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뇌과학적 관점에서 내 또래의 인간은 이미 삶이 극적으로 변화할 가능성 대부분을 잃었다고 볼 수 있다. 회사와 집을 오가며 사는 40살 남자의 뇌가 생전 처음 경험하는 완전히 새로운 감각을 찾기는 쉽지 않으니 말이다.

거칠게 말해서 ‘새로울 것이 별로 없을 인생’을, 왜 계속해서 끌고 가야 하는지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는 과정. 결국 어른의 남은 생과 운명은 그 지점에서 결정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리액션이 좋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을 최근 자주 한다. 무엇을 먹고, 보고, 체험하든 그 반응으로서 타인을 감화시키려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새로운 경험’이 아니더라도, ‘새로운 반응’을 보이면서 원체험을 덧칠한다.

이미 살면서 여러 번 경험한 일들, 그래서 뻔한 감각과 감정을 맞이할지라도 ‘생활지능’이 높은 이들은 온몸으로 그 순간을 만끽한다. 조그만 외부로부터의 자극도 어린아이처럼 수용할 수 있는 태도를 가진 것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길고 긴 인생을 견디는 지혜가 아닐까.

좀처럼 인생의 새로운 가능성을 도모하지 않는 뇌 속 연결망을, 그나마 느슨하지 않게 만드는 일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세상 거의 모든 일이 ‘대충 아는 맛’이지만 그 감각을 팽팽하게 만드는 것. 그럼으로 인생의 달기도 하고, 쓰기도 한 ‘아는 맛’이 다시 찾아오는 순간 무딘 마음으로 흘려보내지 않고, 원체험에 가깝게 기뻐하며, 슬퍼할 수 있도록 감각을 열어젖히는 일.

귤이 어떤 맛인지 이미 알고 있어도, 그 상큼함에 몸을 떨 수는 있다.

‘아는 맛’을 대하는 설렘이, 어른이 생을 버티는 힘이니까.

김선욱 레디투다이브 대표

■출판사에서 10년간 마케팅을 하며 <소행성책방>, <교양만두> 등의 채널을 통해 지식교양 콘텐츠를 만들어왔다. 현재 출판사 '레디투다이브'의 대표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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