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1988년 6월 27일 유공 에틸렌·폴리올레핀 신규 울산공장 건설현장을 시찰 중인 최종현 선대회장. 1989년 12월 SUPEX 세미나에서 발언 중인 최종현 선대회장. 1996년 3월 28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린 한국이동통신의 세계 최초 CDMA 상용화 성공 기념행사에 참석한 최종현 선대회장(왼쪽에서 세번째). 1993년 2월 12일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으로 공식 추대된 최종현 선대회장. 사진=SK그룹
고금리·고물가·고환율에 중동 전쟁 등 지정학적 리스크가 겹치며 글로벌 경제가 요동치고 있다. 한국 경제도 마찬가지다. 한국개발연구원(KDI) 등 주요 기관은 올해 실질 GDP 성장률을 1.8~1.9% 수준으로 전망하며, 내수 부진과 보호무역 리스크를 우려하고 있다.
이런 엄중한 경영 환경 속에서 재계 2위 SK그룹이 창립 73주년을 맞아 고(故) 최종건 창업회장과 고 최종현 선대회장(1929~1998)의 경영철학을 전면 재조명하고 있다. 특히 최종현 선대회장의 ‘역투자(逆投資)’ 리더십이 주목받고 있다. 경기 침체기나 불확실성이 클수록 오히려 미래 성장 동력을 선점하는 ‘역발상 경영전략’이기 때문이다.
최종현 리더십 ”위기를 두려워 말라”
최종현 선대회장은 1973년 형 최종건 창업회장 별세 후 회장에 오른 뒤, 섬유 중심의 중견기업 ‘선경(현 SK)’을 에너지·화학·통신 중심의 거대기업으로 키워낸 핵심 인물이다. 특히 최 선대회장은 ‘위기 국면’에서 빛을 발한 경영자로 유명하다. 글로벌 경제위기로 불확실성이 극대화될 때마다 위기에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기회로 삼는 과감한 전략을 구사하며 회사를 성장시켰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1980년 대한석유공사(유공, 현 SK이노베이션) 인수다. 제2차 오일쇼크로 글로벌 경제가 혼란에 빠진 시기, 섬유기업이었던 선경이 과감히 석유산업에 뛰어들었다. 최 선대회장은 미국 걸프(Gulf) 사가 보유하고 있던 유공 지분 50%와 경영권을 인수했고, 이를 기반으로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를 완성, 재계 5위로 도약할 수 있었다.
1983년 4월 미국 코노코사와 공동으로 인도네시아 카리문 광구 석유 개발에 투자, 우리나라 자원 개발 1호 기업이 됐다. 사진=SK그룹
여기서 중요하게 볼 지점은 석유산업에 도전한 시점이다. 1980년은 2차 오일쇼크의 여파가 남아있고, 국내 정치 불안 및 경제 침체가 겹친 최악의 위기 국면이었다. 대부분의 기업이 현금을 움켜쥐고 생존을 도모하던 시기에, 최종현 회장은 미래 에너지 패권을 위해 사상 최대의 베팅을 감행한 것이다. 그 결과 선경은 재계 5위 그룹으로 도약했고, 오늘날 SK이노베이션의 탄탄한 뿌리가 됐다.
또 다른 명장면은 1994년 한국이동통신 인수다. 이동통신 시장이 미개척지였던 당시, 한국이동통신 민영화 입찰에서 최 선대회장은 시가의 4배를 초과하는 입찰가를 과감히 베팅했다. 주변 임원들이 강력히 재고를 건의했지만, 그의 뜻은 확고했다. 지나치게 높은 가격에 인수한 것 아니냐는 의견에 대해 그는 “우리는 기업을 산 것이 아니라 통신사업 진출의 기회를 산 것이다. 기회를 돈만으로 따질 수는 없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한국이동통신은 훗날 SK텔레콤이 되어 세계 최초 CDMA 상용화를 이끌었고, SK그룹의 양대 수익 기반 중 하나로 성장했다. 당시 '비상식적 고가 인수'로 비판받았던 그 결단은 결국 가장 합리적인 장기 투자였다.
SKMS와 SUPEX ‘사람 중심 시스템 경영’
최종현 선대회장의 역투자 리더십이 일회성 결단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체계로 작동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배후에 견고한 경영 철학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1979년 그가 정립한 SKMS(SK Management System)는 경영의 목적과 방향, 의사결정 기준을 통일적으로 규정한 SK 고유의 ‘경영 헌법’이다. 서양의 합리적 경영 이론과 동양의 인간 중심 사상을 결합해 만든 이 체계는 단순한 규정집이 아니라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는 사고의 틀이 됐다.
1990년대 추가된 ‘SUPEX(Super Excellent) 추구법’은 SKMS의 실천지침이 됐다. SUPEX는 ‘Super(굉장히 좋은)’와 ‘Excellent(훌륭한)’의 합성어로 ‘인간의 능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을 말한다. 수펙스는 “내가 할 수 있는 최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를 외치며 임직원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는 방법론으로, 비현실적일 정도로 높은 목표 달성을 지향하는 SK그룹의 핵심 경영철학이다.
SK그룹 창립 73주년을 맞아 제작된 영상에서 인공지능(AI)으로 재현된 최종현 선대회장. 사진=SK그룹
이 철학에서 실패는 질책의 대상이 아니라 다음 도전을 위한 축적이다. 최 선대회장이 ‘실패에 대해 거론하지 말라’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장기적 투자와 반복되는 도전만이 최고 수준에 도달하는 유일한 경로임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철학적 기반으로는 ‘인본주의’와 ‘사업보국’을 제시했다. “인간은 석유보다 무한한 자원”이라며 인재를 최우선했다. “우리는 사회에 빚을 지고 있다. 기업 이익은 처음부터 사회의 것”이라는 말처럼 ESG 경영의 선구자였다. 노사관계도 “한 식구”로 봤다. 21세기 비전 ‘일등국가론’에서는 “한국은 세계 10대 경제강국, SK는 100대 기업”을 제시하며 장기적 인재양성(100년 계획)을 강조했다.
또 하나의 핵심 원리는 인간 위주의 경영이다. '첫째도 인간, 둘째도 인간, 셋째도 인간'이라는 그의 어록은 단순한 구호에 그치지 않고, 회장 결재 칸 폐지, 출퇴근 카드 제도 폐지, 해외 MBA 프로그램 도입, 국내 최초 기업 연수원 개원 등은 당시 한국 재계에서 파격적인 인사 혁신으로 이어졌다. 구성원이 패기 있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리더의 첫 번째 임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도전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2026년 한국 경제는 저성장이 이어지는 가운데, 불확실성이 나날이 커지고 있는 위기 국면으로 분석된다. SK그룹의 경우 배터리 사업 캐즘 지속, 에너지 구조조정, 반도체·AI 경쟁 심화 극복이 과제다. SK하이닉스가 HBM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며 글로벌 AI 인프라의 핵심 공급자로 부상, 그룹의 대표 캐시카우로 자리잡았지만, AI 기술의 발전 경로에는 너무 다양한 변수가 많아 막연한 낙관은 위험하다.
이런 상황에서 주목받는 것이 최종현 선대회장의 ‘역투자 리더십’이다. 최태원 회장은 부친의 ‘인간 중심’ 철학을 ‘행복경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적 가치 창출을 강조하며 ESG 경영을 선도하고 있지만, 위기 국면에서는 선대회장의 SUPEX 기본기를 강조한다. SK하이닉스 인수와 AI 투자 성공 사례는 이미 최 회장이 선대의 ‘역투자’ DNA를 보유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최종현 선대회장의 경영 철학이자 인생 철학. 사진=SK그룹
SK그룹은 지난 4월 8일 서울 종로구 선혜원(최종건 창업회장 사저)에서 ‘메모리얼 데이’를 비공개로 열었다. 최태원 회장, 최창원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 등 오너 일가와 경영진 40여 명이 참석해 창업·선대회장 어록을 공유하며 “회사 발전이 곧 나라 발전”이라는 초심을 다졌다.
또, 4월 13일부터는 최종건 창업회장과 최종현 선대회장이 구성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담은 5분 분량의 AI 제작 영상을 SK서린빌딩 1층 미디어월(전광판)을 통해 상영 중이다. SK그룹은 이전에도 종종 창업세대를 기리는 영상을 제작해왔으나 컴퓨터 그래픽이나 실사가 아닌 AI로 영상 전체를 만든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처럼 현 시점에 SK그룹이 최종현 선대회장의 리더십을 재조명하는 것은 석유 파동, 지역 분쟁으로 인한 경제 침체, 금융 불안 등 그가 살았던 시대의 위기 요인들이 현재도 유사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SK그룹이 선대회장의 유산을 바탕으로 재계 2위 저력을 재확인하고, 한국 경제에 새로운 성장 동력을 제공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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