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기술은 누군가의 퇴근길 가방 속에 담겨 조용히 국경을 넘는다. 수십 년간 쌓아올린 연구 성과와 국가 전략 기술이 출력물 몇 장, USB 메모리 스틱에 담겨 사라진다. 기술 유출 사건은 매년 수십 건씩 적발되지만, 그 전모는 단편적으로만 드러난다. 비즈한국은 4부작 기획 ‘기술간첩’을 통해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유출의 순간을 재구성한다.
1.
2022년 3월, 지수환 실장은 경기도 광주의 한 사무실에서 프로젝트 개요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중국 회사의 투자를 받아 퍼니스 장비를 개발하는 계획이었다. 퍼니스 장비는 반도체 제조 공정에서 원자층을 한 겹씩 쌓아 올리는 ALD 증착 공정의 핵심 설비다. 국내 주요 반도체기업에 납품하는 고가 장비로, 한 대 가격이 수십억 원에 달했다.
지 실장이 중국과 인연을 맺은 건 6년 전이었다. 21년간 국내 주요 반도체 기업에 몸담았던 그는 퇴사 후 1년이 지난 2016년 허페이로 향했다. 안후이성 성도인 허페이는 중국 정부가 반도체 굴기의 거점으로 점찍은 곳이었다. 지 실장은 그곳에서 여명메모리테크의 D램 개발실장 자리를 꿰찼다. 여명은 메모리 반도체 제조사를 표방하며 막대한 국가 자본을 등에 업고 출범한, 중국 반도체 굴기의 상징과도 같은 회사였다.
중국은 퍼니스 장비를 자체 개발하는 역량이 절실했다. 여명의 목표는 17~18나노 D램 공정 개발. 한국 기업이 수조 원을 쏟아부어 완성한 경로를 처음부터 다져가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어림잡아도 수백억 원에 달하는 프로젝트였다. 지 실장은 지름길을 알고 있었다. 그는 전화를 들었다.
2.
전화를 받은 사람 중 한 명은 양대원 팀장이다. 국내 A 장비사에서 ALD 장비 기구설계를 총괄하던 인물. “같이 해보자.” 제안은 직설적이었다. 거액의 연봉 제안이 뒤따랐다. 그와 팀원 남정국이 합류했다. B 장비사의 신동식, C 장비사 출신 주진일까지 연결됐다. 각자 다른 회사에 있었지만, 장비 하나를 완성하는 데 필요한 퍼즐은 모두 갖춰졌다.
기구, 전장, 공정.
이들이 모인 곳은 상하이 신설된 반도체 장비업체 신승유한책임회사. 중국 측 투자사인 푸성과 지 실장 측이 협의해 만든 반도체 장비 개발사였다. 개발된 기술의 최종 목적지는 여명메모리테크였다. 지 실장이 6년 전 D램 개발실장으로 몸담았던 바로 그 회사.
‘신 프로젝트’가 구체화됐다. 지수환이 부사장에 오르고, 양대원이 기구팀장, 남정국·주진일이 기구팀원, 오성훈이 전장팀장을 맡는 계획이었다.
3.
처음에는 선을 긋는 듯 보였다. “한국 자료는 안 된다.”
하지만 요청은 바뀌었다. “참고만 하자.”
2022년 5월의 어느 날, 저녁 경기도 이천 A 장비사 사무실. 양 팀장은 팀원 남정국을 불러 도면 출력 지시를 내렸다. 프린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A 장비사가 2016년부터 100억 원 넘는 개발비를 들인 ALD 장비 ‘Falcon’의 모듈 제작 및 조립도면이었다. 어떤 화학물질로, 어떤 온도와 압력에서, 어떤 순서로 원자층을 쌓는지가 담긴 설계 정보. A 장비사가 10년 가까이 쌓아온 노하우의 집약체였고, 국가첨단기술로 지정된 기술이었다.
두 사람은 1120장에 달하는 출력물을 나눠 들고 사무실 문을 걸어 나갔다. 양 팀장의 자동차 트렁크 덮개가 닫혔다.
4.
유출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양 팀장은 퇴사를 앞두고 자료를 따로 모았다. FIMS 유닛 도면 130장. 부품 3200여 개의 BOM. 원가, 소재, 거래처까지 포함된 리스트였다.
오성훈도 전장 설계를 정리했다. 프로젝트에 가담한 사람들의 소속 회사마다 이 작업이 조용히 반복됐다. 자료는 조각으로 쪼개졌지만, 모이면 하나의 장비가 됐다.
5.
신승 계약이 확정된 직후였다. 2022년 9월, 지수환은 집에서 NAS 서버를 열었다. 국내에 구축된 저장소. 인터넷이 연결된 곳이라면 어디서든 접근 가능한 공유 저장장치였다. 이 서버는 중국 신승 개발팀 전체가 공유하는 자료 창고로 쓰일 예정이었다.
폴더 이름은 단순했다. ‘한국 자료 보관’. 신승 장비 개발용 자료뿐만이 아니었다. 6년 전 허페이 시절에도 보관해온 전 회사의 D램 공정 자료들도 함께였다. 국내 반도체사의 공정순서도를 노트에 손으로 옮겨 적어 몰래 반출한 파일, 모니터 화면을 스마트폰으로 찍어 만든 파일. 국가핵심기술로 지정된 공정 정보였다. A 장비사에서 빼낸 도면들도 뒤따라 올라갔다. 두 갈래의 자료가 하나의 서버 안에서 합쳐졌다. 중국 업체가 필요로 하는 기술이 이 경로를 통해 건너갈 터였다.
6.
2023년 1월, 상하이 신승 사무실.
양 팀장은 외부 협력업체에 메일을 보냈다. “A 장비사 기반 데이터입니다. 보안 유지 부탁드립니다.”
남정국은 그 자료를 바탕으로 신승 장비 도면을 다시 그렸다. 유사한 구조, 비슷한 배치.다만 이름은 새로 지었다. 이제 장비는 ‘새로 개발된 것’이 됐다.
내부에서는 위험을 인지하고 있었다. 지수환은 지인에게 물었다.
“이거 문제되나.”
답을 기다리기 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다른 메시지에는 이렇게 남겼다.
“부경법 걸릴 것 같으니까 조심해.”
7.
이상 징후는 기록으로 남았다. 출력 이력. 파일 이동 흔적. 이메일 송수신 기록.
각각은 단편이었지만, 연결되자 흐름이 됐다.
국가정보원이 첩보를 바탕으로 이상 징후를 포착한 건 2023년 봄이었다. 검찰은 국정원의 수사 의뢰를 받아 그 흐름을 따라갔다. 확보된 자료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구조가 같았고 배열이 유사했다. ‘새로 만든 설계’가 아니었다.
신승 프로젝트가 멈춰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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