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갈등 속 '제3의 축'으로 떠오른 글로벌 사우스
인도는 시장, 베트남은 생산…주요 기업 글로벌 사우스 공략 본격화
수요와 공급망 동시에 잡는 '산업 전략 대전환'
기회와 리스크 공존, 새로운 시험대 될 변화
이재명 대통령이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 제공= 청와대
[오피니언뉴스=박정훈 기자]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흐름이 빨라지는 가운데 한국 산업은 새로운 선택지로 눈을 돌리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과 주요 기업 총수들이 동행한 인도·베트남 순방은 이러한 변화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번 행보는 단순한 경제 협력을 넘어 미·중 갈등이라는 구조적 리스크를 넘어서는 전략적 대응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한국 산업이 기존의 대미·대중 의존 구조에서 벗어나 새로운 성장 축을 모색하고 있다는 신호로 읽힌다.
미·중 갈등 속 부상하는 '글로벌 사우스'
과거 ‘전통적 개발도상국’의 범주로 한정됐던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의 정의는 최근 비서구 신흥국을 중심으로 생산과 소비, 자원을 동시에 담당하며 새로운 경제 중심지로 부상한 국가군으로 확장됐다. 대표적인 국가로는 인도,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이 있으며 이들 국가는 빠른 경제 성장과 젊은 인구 구조를 바탕으로 생산과 소비를 동시에 이끄는 성장 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과거에는 저임금 생산기지로 인식됐지만, 이제는 글로벌 기업들이 수요와 공급을 동시에 확보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진출하는 핵심 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이 같은 변화의 배경에는 다자질서에 기반했던 전통적 중견국 외교 환경의 변화가 있다. 김성배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은 "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다자질서에 기반했던 전통적 중견국 연대 방식은 변화를 요구받게 됐다"면서 "안보와 경제의 연계가 강화되면서 환경, 개발, 보건 등 비전통적 협력 영역에도 지정학적 논리가 반영돼 중견국이 활용해 온 ‘틈새 외교’의 공간이 축소됐고, 국제정치가 권력 경쟁 중심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전략적 선택의 압박도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미·중 패권 경쟁은 글로벌 사우스로의 기회 탐색을 가속화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 간 갈등이 심화되면서 기업들은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공급망을 다변화하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이른바 '차이나 플러스 원'(China+1) 전략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은 생산기지이자 소비시장, 자원 공급처로서 복합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전략적 가치가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 특히 니켈과 희토류 등 핵심 자원을 보유한 국가들은 공급망 안정성 측면에서 필수적인 파트너로 떠오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 연합뉴스
왜 인도·베트남인가
이번 순방의 핵심 국가인 인도와 베트남은 글로벌 사우스 전략의 중심축이다. 인도는 약 14억 명의 인구를 기반으로 한 거대한 내수시장과 제조업 성장 잠재력을 갖춘 국가로, 중국을 대체할 생산기지로 주목받고 있다. 베트남은 글로벌 기업들의 생산 허브로 자리 잡으며 수출 중심 제조 거점으로서 위상을 공고히 하고 있다. 한국이 두 국가를 동시에 공략하는 것은 수요와 생산을 동시에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해석된다. 이는 미·중 중심 수요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한 산업 전략의 전환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국내 4대 그룹으로 대표되는 주요 기업들은 이러한 흐름에 맞춰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삼성전자는 베트남을 글로벌 스마트폰 생산의 핵심 기지로 삼고 있으며, 인도에서는 세계 최대 규모의 모바일 생산공장을 기반으로 내수와 수출을 동시에 확대하고 있다. 프리미엄 스마트폰 판매 확대와 함께 현지 생산 비중을 높이며 시장 지배력을 강화하는 모습이다.
현대자동차는 인도 시장에서 점유율을 끌어올리며 현지 2위권 업체로 자리 잡았다. 첸나이 공장을 중심으로 내수와 수출을 병행하고 있으며, 인도 증시 상장을 추진하는 등 현지화 전략도 강화하고 있다.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에서는 전기차 생산 기반을 구축하며 동남아 시장 선점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SK는 배터리와 에너지 사업을 중심으로 글로벌 사우스 공략을 확대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니켈 등 핵심 원자재 확보와 배터리 밸류체인 구축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으며, 동남아 지역 전반에서 에너지·환경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생산기지 확보를 넘어 공급망 핵심 자원을 선점하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LG는 가전과 배터리를 중심으로 ‘현지 완결형’ 사업 모델을 강화하고 있다. 인도와 베트남에서 생산과 판매를 동시에 확대하며 프리미엄 가전 시장을 공략하고 있고, 배터리 사업에서는 인도네시아 등을 중심으로 원재료 확보부터 생산까지 이어지는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들 기업의 공통된 전략은 ‘수요와 공급망의 동시 확보’다. 글로벌 사우스를 단순한 생산기지가 아닌 소비시장으로도 활용하며, 공급망 리스크를 분산하는 동시에 새로운 수익원을 창출하려는 시도다.
사진 제공= 국가안보전략연구원
기회와 리스크 사이, 새로운 시험대
글로벌 사우스 전략은 한국 산업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이 한국에 주목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산업과 기술 경쟁력이 결합된 독특한 역량 때문이다. 한국은 글로벌 공급망의 주요 축에 자리하고 있을 뿐 아니라, 기술을 실제 생산과 납품, 사후 관리까지 이어지게 만드는 제조 기반을 갖춘 몇 안 되는 국가다.
여기에 더해 주목할 요소는 ‘소프트파워’다. 단순히 문화 콘텐츠의 인기 차원을 넘어, 한국과의 협력은 상대적으로 정치적 부담이 낮은 환경에서 사회적 친밀감과 제도적 신뢰를 동시에 형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 가치를 지닌다.
한국의 입장에서 글로벌 사우스 전략은 미·중 중심의 수출 구조를 다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동시에 반도체, 배터리, 소재 등 핵심 산업의 공급망 안정성을 확보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중 갈등 속에서 전략적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완충지대로서의 가치도 부각된다.
다만 리스크도 존재한다. 글로벌 사우스 국가 특유의 정치·제도적 불확실성과 잦은 규제 변화, 인프라 부족 등은 기업 활동의 제약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여기에 미국과 중국, 일본, 유럽 등 주요 국가들 역시 글로벌 사우스 시장을 둘러싸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점도 부담 요인이다. 기회가 큰 만큼 경쟁 강도 역시 높은 시장이라는 의미다.
글로벌 사우스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전략의 문제로 바뀌고 있다. 미·중 리스크를 넘어 새로운 기회를 찾기 위한 한국 산업의 움직임은 이미 시작됐다. 인도와 베트남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그 출발점이다. 한국 산업이 이 새로운 축에서 얼마나 빠르게 자리 잡느냐가 향후 성장의 방향을 결정할 핵심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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