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적 피크" vs "산업 재편의 시작"···
대세 상승장 진입… AI 반도체, 범용 부품 넘어 '전략 자산'으로
고부가 제품 품귀 현상 지속… '피지컬 AI'가 장기 수요 견인
대한민국 경제의 대동맥인 반도체 산업이 전대미문의 길을 걷고 있다./인공지능 생성 이미지, 그린포스트코리아 그래픽
대한민국 경제의 대동맥인 반도체 산업이 전대미문의 길을 걷고 있다. 일찍이 우리 기업이 세계 산업계를 이토록 쥐락펴락한 적은 없었다. 구글, 엔비디아, 애플 등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글로벌 빅테크들이 한국산 고대역폭메모리(HBM)를 구하기 위해 줄을 서고, 공급사가 부르는 게 곧 가격이 되는 ‘판매자 우위 시장’이 열렸다. 하루아침에 세 배나 뛴 계약서에도 글로벌 기업들이 흔쾌히 도장을 찍는 광경은 이제 낯설지 않다.
자본시장은 이미 뜨겁게 달아올랐다. 11일 오후 1시 10분 기준 SK하이닉스의 주가는 188만 8000원을 기록했다. '200만닉스'가 가시권에 들어왔다. 삼성전자 주가도 28만 5500원으로 '30만 전자' 실현을 코앞에 뒀다. 1년 만에 삼성전자 주가는 5배, SK하이닉스는 10배 가까이 폭등했다. 반도체발 훈풍에 코스피 지수 역시 3배나 뛰며 ‘천당’을 맛봤다.
하지만 단군 이래 최고의 불장을 경험 중인 투자자들의 마음 한구석에는 묘한 불안감이 엄습하고 있다. "이 장밋빛 잔치가 내일 당장 끝나버리는 것 아닐까." 전문가들이 연일 슈퍼사이클의 지속을 외치고 있지만, 시장의 시선은 이미 그 정점이 어디일지, 그리고 그 이후의 추락은 얼마나 깊을지에 쏠려 있다.
과거 메모리 반도체는 PC와 스마트폰 교체 주기에 따라 2~3년마다 급등락을 반복하는 전형적인 천수답형 '사이클 산업'이었다. 그러나 이번은 결이 다르다. 생성형 AI라는 거대한 파도가 메모리를 단순한 IT 소모품에서 'AI 성능의 핵심 결정 요소'로 격상시켰다.
업계에서는 이번 슈퍼사이클이 향후 10년을 좌우할 구조적 변화라고 분석한다. 실제로 2026년 메모리 시장은 사상 최대 매출을 경신할 전망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고객사들의 태도 변화다. 과거 가격 협상의 주도권을 쥐었던 애플조차 차세대 아이폰용 저전력 메모리(LPDDR5X) 물량 확보를 위해 기존 가격의 3배를 지불하는 장기 공급 계약(LTA)을 맺을 만큼 절박한 처지가 됐다.
2029년까지 이어지는 구조적 공급부족 ··· '피지컬 AI'가 대세 잇는다
공급 부족 현상은 단기에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2027년 서버용 D램 수요는 60~70% 급증할 것으로 보이나, 공급 증가율은 20%대 수준에 그칠 전망이다. 삼성전자가 평택 5공장(P4) 착공을 앞당기고 SK하이닉스가 청주 M15X에 20조 원을 쏟아붓고 있지만, 반도체 라인 증설에 소요되는 물리적 시간을 고려하면 2029년까지는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쇼티지'가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대신증권에 따르면 내년 메모리 시장 규모는 전년 대비 157% 성장한 5,632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합산 영업이익이 500조 원을 돌파할 것이라는 파격적인 관측도 나온다. AMD가 진단하듯 AI 시장은 이제 막 태동기를 지났을 뿐이며, 글로벌 연산 수요는 향후 5년 내 10 Yotta Flops(요타플롭스) 규모로 폭증할 것이기 때문이다.
데이터센터 중심의 수요는 향후 로봇과 자율주행차로 대변되는 '피지컬 AI(Physical AI)'로 전이될 전망이다. 인간의 신체 활동을 보조하는 기기들은 서버 이상의 방대한 데이터를 실시간 처리해야 하므로 D램 수요의 새로운 기폭제가 된다.
일각에서는 데이터 압축 기술이나 차세대 메모리(CXL 등)의 등장이 기존 수요를 잠식할 것이라 우려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를 '제번스의 역설(Jevons’ Paradox)'로 설명한다. 기술 진보로 효율이 높아지면 오히려 데이터 사용의 총량이 늘어나 결과적으로 메모리 수요를 더 창출하게 된다는 논리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와 남겨진 과제
반도체의 질주는 한국 증시의 고질병인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로 이어지고 있다. 과거 1985년과 2005년의 호황기 당시 코스피 PBR(주가순자산비율)이 2배까지 상승했던 사례를 비추어 볼 때, 현재 1.6배 수준인 지수는 추가 상승 여력이 충분하다는 평가다.
한동희 SK증권 연구원은 "최근 3~5년 단위 장기공급계약(LTA) 논의가 이어지며 메모리 시장이 장기 계약 물량과 일반 시황 물량으로 나뉘는 양상도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업계에서는 과거 PBR 중심으로 평가받던 메모리 업체들이 점차 PER 중심으로 재평가받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며 "실제로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12개월 선행 PER은 각각 약 6배, 5배 수준으로 글로벌 AI 관련 기업들과 비교하면 여전히 저평가 구간"이라고 분석했다.
물론 주가가 미래 가치를 과도하게 선반영했다는 '피크아웃' 우려도 만만치 않다. HBM 공급 확대에 따른 가격 상승폭 둔화나 미·중 갈등 같은 대외 변수는 언제든 시장의 변동성을 키울 수 있는 화약고다.
일부 전문가들은 또한 상대강도지수(RSI) 70선을 주시하고 있다. RSI가 70 이상이면 '과매수', 30 이하면 '과매도'로 해석하는데 , 이 지표가 70 아래로 내려오는 시점을 매수세가 꺾이는 신호로 보기 때문이다.
최근 삼성전자의 RSI는 70선 근처에서 공방 중이며, 하향 돌파 시 단기 조정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SK하이닉스의 경우 최근 RSI가 83.7까지 치솟았다. 70을 하향 돌파하는 시점이 강력한 경고등이 될 수 있어 변동성에 주의해야 한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한 업계 관계자는 "단기 과열 지표만으로 하락을 예측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지표상 과열이지만 AI발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더욱 가열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결론적으로 지금의 시장은 '슈퍼사이클 2.0'의 한복판에 서 있다. 단기적인 실적 선반영에 따른 숨 고르기는 필연적일 수 있으나, AI라는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이 유효한 한 우상향의 궤적은 꺾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 투자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기 변동성에 일희일비하기보다 AI가 가져올 산업 지각변동의 깊이를 꿰뚫어 보는 혜안이다.
신경훈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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