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배우근 기자] 배우 하영의 증조부 안상호와 관련한 친일 기록이 추가로 공개되자 비판의 화살이 하영에게까지 향하고 있다.
일요신문은 18일 일제강점기 일본어 종합잡지 ‘조선공론’이 1913년 9월 발행한 제1권 제6호 내용을 단독 보도했다.
안상호는 잡지의 ‘일선동화’ 연재에서 첫 번째 인물로 등장한다. 기사 제목부터 ‘일선동화의 선구 조선인 남편·일본인 아내 평판기’다.
‘일선동화’는 일본과 조선을 하나로 동화한다는 뜻이다. 일제가 193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내세운 ‘내선일체’보다 앞서 사용된 식민통치 논리다.
‘조선공론’은 경성에서 진료소를 운영하던 안상호를 두고 “말씨에서부터 태도까지 일본 내지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평가했다.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한 뒤 귀국한 그의 경력과 환자들로 붐빈 진료소도 자세히 소개했다.
일본인 아내 가와구치 이소코와의 결혼 과정은 연애담처럼 풀어냈다. 안상호는 일본 체류 당시 의친왕 이강의 의사로 일했고, 의친왕을 보좌하던 이소코와 1907년 결혼한 것으로 전해졌다.
잡지는 안상호 부부가 자녀를 일본식으로 양육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안상호가 상당한 토지를 보유했다는 사실은 다른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1926년 ‘매일신보’에는 시흥군 일대에 있는 안상호 소유 산림 10만여 평을 일본인 관리인이 관리했다는 내용이 실렸다.
안상호를 일본에 동화된 ‘모범 조선인’으로 묘사한 기록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07년 일본 의학 전문지 ‘의해시보’는 일본인 의사 사토 스스무가 안상호를 대한병원 의사로 채용하려 했다고 전했다. 당시 사토는 이토 히로부미 통감에게 안상호의 채용 문제를 상의하며 그를 조선 의학교육의 모범이 될 인물로 평가한 것으로 나온다.
1918년 ‘매일신보’는 안상호 가족을 ‘일선동체의 가정’으로 소개했다. 안상호는 당시 자신을 “일본 사람과 똑같다”고 표현했다.
그는 조선 옷은 한 벌도 없고 매운 음식도 먹지 못한다고 말했다. 조선 사람과는 별로 교류하지 않는다는 발언도 남겼다.
생활방식만 일본을 따른 것도 아니다. 안상호는 1916년 조선인과 일본인의 친목·융화를 내세운 대정친목회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 준비위원에도 이름을 올렸다.
경성부 협의회원과 경성 종로금융조합장 등 일제 통치체제 안에서 여러 직책도 맡았다. 단순히 일본에서 공부하거나 일본인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친일 논란이 제기된 게 아니다.
민족문제연구소도 지난 14일 “안상호의 친일 행적은 명백하다”고 밝혔다. 대정친목회와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 활동, 1918년 발언 등을 근거로 안상호를 일제의 동화정책을 전면적으로 내면화한 대표적 인물로 평가했다.
하영은 지난 12일 자필 사과문을 통해 “관련 자료를 직접 확인하는 과정에서 증조부의 친일 행적을 알게 됐으며,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가족의 자랑처럼 언급한 점을 반성한다”고 고개숙였다.
하지만 안상호의 친일 관련 추가 기록이 나올때마다 논란의 불똥은 하영에게 튀고 있다. 여론은 하영 증조부의 행적을 지적하는데 그치지 않고 있다.
“진짜 신기한게 까도까도 계속 나옴 철저히 일본인으로 살려고 어지간히 열심히 살았는가봄”, “이건 자숙한다고 될 문제가 아님”이라는 반응이 이어졌고 심지어 배우 은퇴를 요구하는 댓글까지 등장할 정도다.
또 다른 누리꾼은 “조국이 광복되고 나라의 국격이 이렇게 높아질줄 몰랐겠지. 모든 업보를 자손들이 받게될거다”라고 적기도 했다.
반면 연좌제를 반대하는 댓글도 보인다. 증조부의 친일 행적과 후손인 하영의 책임은 구분해야 한다는 시선이다.
하영을 둘러싼 갑론을박이 계속되지만, 사료가 가리키는 당사자는 안상호다. 역사적 사실은 정확히 기록하되, 그 책임까지 혈연을 따라 하영에게 물어서는 안된다.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과 연좌제를 되살리는 일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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