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전엔 세계 자유 통행 수로
혁명수비대가 실질적 장악
이란의 전략적 지렛대로 부상
가상화폐·위안화 ‘통행료’ 받아
걸프국들 “국제법 위반” 반발
수백척 선박 중동에 발 묶여
해운업·보험업계는 관망 모드
호르무즈 해협 지도. (출처: 연합뉴스)
[천지일보=이솜 기자] 미국과 이란의 2주 휴전이 발효됐지만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긴장은 오히려 제도화되는 양상이다. 전면 충돌이 잠시 멈춘 사이 이란은 해협 통과 선박 수를 제한하고 통행료 부과 체계를 굳히려 하고 있으며 선사들은 안전 보장과 운항 절차가 불분명하다며 관망 태세를 이어가고 있다. 전쟁 전 ‘국제 수로’로 간주되던 이곳은 이제 이란 혁명수비대(IRGC)의 허가 없이는 통과할 수 없는 사실상의 ‘통제 구역’으로 변모했다.
로이터통신,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이란은 8일(현지시간) 호르무즈 해협 일부 구역의 기뢰 위험을 이유로 선박들에 대체 항로 2곳을 제시했다.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는 성명에서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려는 모든 선박은 해상 안전을 보장하고 잠재적인 기뢰 위험을 피하기 위해 대체 항로를 이용하라”고 밝혔다. 이란이 제시한 대체 항로는 이란의 게슈므 섬과 라라크 섬 사이, 이란 해안에 바짝 붙어 오만만으로 나가는 경로다. 선박들은 기존 항로 대신 이란 영해에 인접한 북쪽 경로를 이용해야 하며 이는 이란의 물리적 통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단순한 안전 공지가 아니라 해협 통과 방식 자체를 이란이 정한 조건 아래 다시 배열하려는 조치로 읽힌다.
2월 28일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이전까지 이 해협은 국제 수로로서 하루 100척 이상의 선박이 이란과의 군사적 조율 없이 자유롭게 통과했다. 그러나 휴전 합의 다음 날인 이날 해협을 통과한 선박은 S&P 글로벌 마켓 인텔리전스 기준 4척, 윈드워드 기준 11척, 로이드리스트 기준 3척에 불과했다. 전쟁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다.
이란은 중재국들에 휴전 기간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할 수 있는 선박 수를 하루 약 12척 수준으로 제한하고 통행료를 부과하겠다는 방침을 전달했다. 통과 선박은 미국과 유럽연합(EU)이 테러 조직으로 지정한 혁명수비대와 조율해야 한다.
이날 아침 해협에서는 IRGC 해군이 VHF 해상 무선을 통해 “허가 없이 통과하는 선박은 파괴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페르시아만과 오만해의 모든 선박에 방송하고 있었다고 WSJ가 한 선원의 녹음을 인용해 보도했다.
이란은 단순한 통행 통제를 넘어 유료화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WSJ에 따르면 이란은 중재자들에게 해협 통과 선박을 하루 약 12척으로 제한하고 통행료를 부과하겠다고 통보했다. 선박들은 사전에 IRGC 통행료를 협의해야 하며 결제는 암호화폐 또는 중국 위안화로 이뤄지고 있다.
통행료 규모는 선박 크기에 따라 달라진다. 약 200만 배럴의 원유를 실을 수 있는 초대형유조선(VLCC)의 경우 최대 200만 달러에 달한다고 중개인과 선주들이 전했다. 해양 분석업체 윈드워드는 출항 원유에 대해 배럴당 최대 1달러의 통행료가 부과되고 있다고 밝혔다. 최대 300만 배럴을 적재하는 초대형유조선 기준으로 상당한 금액이다.
이란은 이미 차등 요금제를 적용하고 있다. 이란산 원유나 물자를 실은 선박은 무료로 통과하고 우호국 선박에는 일정 통행료를 부과하며 미국이나 이스라엘 동맹국 선박은 아예 통과를 차단하는 3단계 구조다.
이란은 또한 중재자들에게 통행료를 오만과 분배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기본 통행료, 안보 호송 비용, 행정 처리 비용을 묶어 부과하는 구조다. 그러나 미국-이스라엘 공격에 반대하면서도 이란의 미사일과 드론 공격을 당한 오만은 이 계획에 동의하지 않았다.
[호르무즈=AP/뉴시스] 2023년 5월 19일(현지 시간) 호르무즈 해협에서 대형 컨테이너선 등이 항행하고 있다.
◆자연 수로 통행료 부과 논란
이란의 이러한 행보는 국제법적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걸프 지역 국가들은 이란의 제안이 공해에서의 자유 항행을 보장하는 ‘유엔 해양법 협약(UNCLOS)’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실제로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나 파나마 운하와 달리, 호르무즈 해협·영국 해협·지브롤터·말라카 해협 같은 자연 수로에 대한 통행료 부과는 국제해양법상 허용되지 않는다.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전쟁 종료 후 가장 큰 과제가 이란의 통행료 부과를 막는 것이라며 이를 불법적이고 위험하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그는 해협에 가장 크게 의존하는 유럽과 아시아 국가들이 행동의 주체가 돼야 하며 미국은 참여하되 주도할 필요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에너지와 물류의 병목 현상은 이미 세계 경제에 가시적인 타격을 주고 있다. 해협 폐쇄 및 통제 여파로 전 세계 식료품 가격이 상승하고 소비자 물가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은 전 세계 해상 원유의 38%, LNG의 19%뿐만 아니라 비료, 화학 제품,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인 헬륨의 주요 운송 경로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해운사들은 여전히 해협 통과를 극도로 꺼리는 분위기다. 보험료가 고공행진을 이어가는 가운데 어떤 기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지, 어떤 선박이 우선권을 갖는지 등에 대한 기준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해운업계 분석 회사인 로이드 리스트 인텔리전스의 선임 위험 및 규정 준수 분석가인 브리짓 디아쿤은 WSJ에 “이란으로부터 명확한 안전 보장이 없는 한, 대부분의 선주들은 휴전 상황을 지켜보며 대기할 것”이라고 전했다.
마린트래픽 데이터에 따르면 유조선 426척, LPG 운반선 34척, LNG 운반선 19척 등 수백 척의 선박이 걸프 지역에 발이 묶여 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천지일보 카톡
1644-7533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