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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는 옛말…2026년 日 소비 키워드 '쿠로 캔슬(苦労...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 일본인이 오랫동안 삶의 덕목으로 삼아온 이 속담이 힘을 잃고 있다. 그 자리를 파고든 새로운 소비 키워드가 '쿠로 캔슬(苦労キャンセル)'이다. 우리말로 옮기면 '고생을 없애버린다' 정도가 된다.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는 옛말…2026년 日 소비 키워드 '쿠로 캔슬(苦労...

일본 국내외 관광객이 즐겨 찾는 오사카의 대표 번화가 도톰보리. 대형 광고판과 간판이 거리를 수놓으며, 먹거리·쇼핑·극장·술집이 밀집해 언제나 인파로 붐빈다. (이미지=게티이미지뱅크)

[프레스맨 이석호 기자]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 일본인이 오랫동안 삶의 덕목으로 삼아온 이 속담이 힘을 잃고 있다. 그 자리를 파고든 새로운 소비 키워드가 '쿠로 캔슬(苦労キャンセル)'이다. 우리말로 옮기면 '고생을 없애버린다' 정도가 된다. 시간과 돈을 써서라도 귀찮고 번거로운 과정을 지워버리는 소비 방식을 뜻한다. 일본 월간지 닛케이 트렌디는 지난해 11월 발표한 '2026년 히트 예측 베스트 30'에서 이 키워드를 2026년 소비를 읽는 핵심 개념으로 제시했다.

쿠로 캔슬은 단순한 편의 추구와는 결이 다르다. 수고와 시행착오에 들어가는 시간, 정신적 부담을 기술의 힘으로 덜어내고 그 자리에 자신이 원하는 활동을 채워 넣는 방식이다. 닛케이 트렌디는 '돈을 써서라도 고생을 없애고 효율을 높이는 것이 지금의 흐름'이라고 정의했다. 특히 시간 대비 만족도를 뜻하는 일본식 조어 '타이파(タイパ)'를 중시하는 소비 성향이 가속화되면서, 적은 노력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품질을 제공하는 상품과 서비스가 2026년 시장을 주도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생성AI가 삼킨 번역과 쇼핑

쿠로 캔슬 트렌드를 떠받치는 가장 강력한 기술은 생성AI다. 진전이 두드러지는 영역은 번역과 쇼핑이다. 애플 AirPods의 실시간 번역 기능과 iOS 앱 'CoeFont 통역' 같은 서비스가 대표적이다. 음성으로 입력한 내용을 빠르게 외국어로 바꿔 전달하며, 외국어 학습에 쏟아붓던 방대한 시간과 노력을 기술로 대체하는 흐름을 만들고 있다.

쇼핑에서는 아마존이 내놓은 'Alexa+'가 검색과 비교, 추천의 부담을 떠맡는다. 원하는 상품이 뚜렷하지 않아도 취향에 맞는 제품을 추려 제시하는 방식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연구 등에 따르면 사람은 하루 수만 건의 결정을 내리며, 이를 넘어서면 뇌가 '결정 피로'를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AI가 판단의 부담을 대신 짊어지는 구조가 쿠로 캔슬 소비의 뿌리를 이룬다.

식탁 위로 번진 에코노미 구루메

쿠로 캔슬은 외식과 가정식의 경계에서 '에코노미 구루메(エコノミーグルメ)'라는 새 카테고리를 만들어냈다. 전문점에 버금가는 맛을 저렴한 가격에 손쉽게 즐길 수 있는 상품군을 뜻한다. 대표 주자는 닛신제분웨르나의 '마·마 레인지로 2분 생파스타(マ・マー レンジで2分 もちもち生パスタ)' 시리즈다. 상온 보관이 가능해 냉동고를 차지하지 않고, 전자레인지에 2분만 돌리면 생면 특유의 식감을 살린 파스타가 완성된다. 이 제품은 '닛케이 트렌디 2025년 히트 상품 베스트 30'의 간편조리식품 부문 우수히트상을 받았으며, 일본 프로야구 스타 오타니 쇼헤이를 광고 모델로 기용해 주목도를 끌어올렸다.

편의점 채널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2025년 오사카·간사이 엑스포에서 세븐일레븐이 선보인 셀프식 라멘 머신이 화제를 모은 데 이어, 편의점 고급 간편면 카테고리가 외식을 대체하는 선택지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도쿄 시내 라멘 전문점 한 그릇 가격이 1000엔을 훌쩍 넘는 상황에서, 600엔 안팎에 전문점 수준의 맛을 재현하는 편의점 제품은 라멘 애호가에게 줄 서는 시간과 맛집 찾는 수고를 한꺼번에 덜어주는 제안이다. 치솟는 식비를 억제하면서도 초라한 끼니는 싫다는 상반된 욕구가 에코노미 구루메 시장을 키우는 동력이다.

피로사회가 빚어낸 '현명한 포기'

쿠로 캔슬이 확산된 배경에는 일본 사회의 구조적 변화가 깔려 있다. 일본 총무성 집계에 따르면 2023년 65세 이상 취업자는 914만명으로 통계 작성이 시작된 2004년 이후 20년 연속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취업자 전체에서 65세 이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13.5%에 달한다. 맥도날드 일본법인이 아르바이트 연령 제한을 없앤 뒤 고령층 직원 비중이 빠르게 늘어난 사례처럼, 고령자 고용 확대는 일본 서비스업 전반의 흐름으로 자리잡고 있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가 넓어지고 고령층의 노동 연장이 길어지면서, 일과 이후 일상에서 느끼는 피로는 과거보다 훨씬 빠르게 쌓이고 있다. 일본 고령화율은 지난해 9월 기준 29.3%로 역대 최고 수준이며, 일본 실버시장은 100조엔 규모를 넘어서는 것으로 추산된다. 고생을 피하는 것은 더 이상 게으름이 아니라 오히려 현명한 삶의 선택이라는 인식이 이 시장을 떠받치는 심리적 토대다.

K-뷰티에 열린 기회의 창

쿠로 캔슬 흐름은 한국 기업의 일본 진출 전략에도 새로운 좌표를 제시한다. 기능을 끌어올리는 것만으로는 일본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어려운 시대가 열린 만큼, 소비자가 판단하거나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경험을 설계하는 능력이 관건이 됐다. 자동화 가전, AI 추천 서비스, 간편식 정기배송, 올인원 뷰티 제품이 유망 진출 영역으로 꼽힌다.

실제 K-뷰티는 이 흐름을 타고 일본 시장에서 이미 가파른 성장세를 그리고 있다. 일본 시장조사기업 인테지(INTAGE)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51억엔 규모였던 일본 내 K-뷰티 시장은 2023년 313억엔으로 5년 만에 약 6배로 커졌다. 스킨케어는 10배, 포인트 메이크업은 15배 이상 증가했다. 민텔(Mintel) 자료에서도 일본 내 한국 화장품 수입 증가율이 전년 대비 120.8%에 달했다. 토너·에센스·크림이 하나로 합쳐진 멀티 기능 제품이나 원스텝 클렌저처럼 '여러 단계를 지워내는' 제품군이 일본 소비자에게 먹혀든 결과다.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는 시대의 통념은 과거형이 됐다. 일본 소비자는 이제 어떤 수고를 지우고 어떤 경험을 남길지 스스로 골라내기 시작했다. 이 선택이 쌓여가는 2026년, 일본 시장에서 승부를 가르는 조건은 기술력의 높이가 아니라 소비자 일상에서 '덜어낼 지점'을 정확히 짚어내는 감각에 달려 있다. [프레스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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