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기민 경영평론가·세종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
삼성전자를 반도체 산업의 레이스 위에 올려놓으면, 제국의 마차를 이끄는 전차에 가깝다. 속도는 빠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대열의 질서와 보급선이다. 메모리 가격과 AI 수요가 결합된 최근 국면에서 실적이 큰 폭으로 개선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 전차가 가진 생산력과 규모의 힘을 보여준다. 하지만 같은 뉴스는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파운드리 등 다른 축에서는 경쟁과 비용 압력이 동시에 커지고 있음을 함께 말한다. 거대한 조직은 이길 체력이 있지만, 방향을 바꾸는 데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삼성전자의 경영 MBTI는 ESTJ로 보는 편이 가장 현실적이다. 이들은 규칙, 절차, 책임 체계를 통해 거대한 생산 시스템을 운영하고, 목표를 수치와 기한으로 관리하며, 조직의 위계와 표준화를 통해 품질을 만들어 낸다. 반도체 산업은 과학 그 자체이면서 동시에 관료제적 산업이다. 수율, 공정 조건, 장비 캘리브레이션, 고객 인증까지 모든 단계가 문서와 검증의 연쇄로 이어진다. 삼성전자는 그 관료주의를 가장 고도화시킨 기업 중 하나다. 다만 ‘왕권을 유지하는 관료주의’는 장점과 위험을 함께 가진다. 왕권은 일사불란함을 만들지만, 정보가 위로 올라가는 속도를 늦추고, 현장 판단을 조심스럽게 만든다. 엔지니어들이 관료주의에 지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레이스의 핵심 변수는 AI가 만든 HBM 경쟁이다. 시장은 고대역폭 메모리의 공급과 고객 인증이 승부를 가른다고 보고, 엔비디아 같은 핵심 고객의 요구가 생산과 기술 로드맵에 직접적인 압력을 준다. 삼성도 HBM을 포함한 고부가 메모리 확대를 실적 개선의 축으로 제시해 왔다. 그런데 문제는 기술 그 자체만이 아니다. 조직이 기술을 얼마나 빨리 ‘고객이 원하는 형태’로 패키징하고, 영업과 생산을 한 몸처럼 움직이게 하느냐가 동등하게 중요해졌다. DS와 DX의 성과급 갈등처럼 내부 균열 신호가 포착될 때, 관료주의는 단결의 장치가 아니라 분절의 장치로 변질될 수 있다.
▲ 삼성전자 사진제공 – 장기민 박사
삼성전자를 사람으로 보면, 왕좌를 지키는 행정가형 리더에 가깝다. 감정으로 흥분하지 않고, 규칙을 세워 제국을 굴리며, 위기를 만나면 먼저 통제 가능한 변수부터 잠근다. 동시에 자존심이 강해 ‘2등의 학습’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흥미로운 것은, 삼성 반도체가 외부의 시선과 데이터로 조직을 다시 보려는 움직임이 보도된 바 있다는 점이다. 제국이 스스로의 관료주의를 자각하는 순간, 변화는 시작된다.
삼성전자를 향한 필자의 경영자문은 “관료주의를 없애라” 같은 구호가 아닌 왕권의 장점은 유지하며 레이스에 맞는 기어를 추가하는 방식을 처방하는 것이다.
첫째, 반도체 조직을 2단 변속 구조로 재설계한다. 공정, 품질, 안전처럼 실수하면 치명적인 영역은 규정 중심으로 더 단단히 묶는다. 반대로 HBM 고객 인증, 패키징, 제품 기획, 영업 연동 같은 영역은 작은 팀에 권한을 내려 ‘현장의 왕권’을 만든다. 전체 왕권 아래, 목적별 소규모 왕권을 병렬로 두는 방식이다.
둘째, 내부 시장을 도입한다. 각 사업부와 프로젝트가 인재, 장비 시간, 투자 우선순위를 두고 투명하게 경쟁하도록 만들고, 성과급은 사업부 단위가 아니라 ‘제품 성공 단위’로 일부 전환한다. DS와 DX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려면, 돈의 기준을 “누가 벌었나”가 아니라 “누가 연결했나”로 바꿔야 한다.
셋째, 기술 로드맵을 ‘미세공정’과 ‘고객경험’ 두 언어로 동시에 써야 한다. 2나노 같은 공정 리더십은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고객이 원하는 것은 성능과 안정적 공급, 그리고 검증된 생태계다. 메모리와 파운드리, 패키징이 하나의 제품 서사로 묶일 때 레이스는 빨라진다.
삼성전자의 성장성은 여전히 크다. 공식 실적 발표에서도 AI 수요를 중심으로 성장 전략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다만 왕권을 유지하는 방식이 과거와 같아서는 안 된다. 반도체 산업의 레이스는 이제 단순한 기술 경주가 아니라, 의사결정의 구조와 조직의 심리까지 포함한 총력전이다. 삼성은 관료주의로 제국을 만들었다. 다음 국면의 승부는, 그 관료주의에 ‘민첩성의 제도’를 덧붙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왕좌를 지키는 기업이 레이스에서도 이기려면, 빠른 말이 아닌 빠른 결재와 의사결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결재는 종이 위가 아닌 데이터와 현장 권한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