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코리아 라이프사이언스 위크 2026에서 참관객들이 상담을 하고 있다. 뉴스1
국내 바이오·의료 벤처투자가 올해 들어 뚜렷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9월까지 투자액이 2조 원에 육박하며 지난해 연간 투자 규모를 이미 넘어섰다. 다만 과거처럼 초기 기업에 광범위하게 자금이 공급되기보다는 임상 성과와 기술이전 가능성, 기업공개(IPO) 가시성 등을 갖춘 기업을 중심으로 뭉칫돈이 몰리고 있다. 글로벌 대형 투자자들의 참여까지 확대되면서 바이오 투자 시장의 ‘옥석 가리기’가 본격화하고 있다는 평가다.
24일 스타트업 투자정보 플랫폼 더브이씨에 따르면 올해 들어 9월까지 국내 상장·비상장 바이오 기업에 투자된 금액은 1조 9306억 원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연간 투자액인 1조 4741억 원을 이미 31%가량 넘어선 규모다. 투자 건수도 바이오·의료 분야가 130건으로 엔터프라이즈(83건), 반도체·디스플레이(52건), 환경·에너지(51건) 등을 크게 웃돌았다. 투자금이 공개되지 않은 사례를 감안하면 실제 투자 규모는 2조 원을 넘어섰을 가능성도 있다.
바이오 투자는 코로나19 당시 유동성 확대에 힘입어 2021년 3조 2177억 원까지 늘었다가 2023년 1조 1082억 원으로 급감하며 혹한기를 겪었다. 이후 2024년 1조 3483억 원, 지난해 1조 4741억 원으로 증가한 데 이어 올해는 9개월 만에 지난해 연간 투자액을 뛰어넘었다. 중소벤처기업부 집계에서도 올 상반기 바이오·의료 분야 벤처투자액은 1조 5041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53.6% 증가했다.
특히 상장을 앞둔 프리IPO 단계에서 투자 증가세가 두드러졌다. 더브이씨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기준 바이오 분야 프리IPO 투자액은 약 1424억 원이었지만 올해 같은 기간에는 3293억 원으로 131% 이상 증가했다. 초기 투자에 비해 기대수익률은 낮더라도 임상 데이터나 기술이전 등 일정 수준의 성과를 이미 달성했거나 IPO를 통한 투자금 회수가 가시화된 기업으로 자금이 몰리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기업이 넥스아이와 프레이저테라퓨틱스다. 두 회사는 올해 각각 500억 원 규모의 프리IPO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넥스아이는 독자 플랫폼을 통해 발굴한 면역항암제 후보물질 ‘NXI-101’을 2024년 일본 오노약품공업에 기술이전했으며 현재 일본에서 임상 1상이 진행되고 있다. 표적단백질분해(TPD) 기술을 활용해 난치성 질환 치료제를 개발하는 프레이저테라퓨틱스의 투자에는 존슨앤드존슨의 기업형 벤처캐피털(CVC)인 JJDC 등이 참여했다.
임상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낸 기업에도 대규모 투자가 이어지고 있다. 항체 의약품 개발사 이뮨앱스는 380억 원 규모의 시리즈C 투자를 유치해 미국과 유럽에서 진행 중인 임상 2상에 자금을 투입할 계획이다. 에스톤사이언스 역시 암 백신 후보물질의 임상 2상 진입 이후 396억 원 규모의 시리즈D 투자를 유치했다. 상반기에는 알츠하이머병 후보물질을 사노피에 총 10억 4000만 달러 규모로 기술이전한 아델이 490억 원을 확보하는 등 기술이전 성과를 낸 기업에 투자가 집중됐다.
글로벌 투자자들의 움직임도 눈에 띈다. 지난해 해외 투자자의 건당 투자 규모가 50억~100억 원 수준이었다면 올해는 글로벌 대형 VC 등이 수백억 원을 투입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더브이씨에 따르면 해외 투자자가 참여한 투자 라운드의 건당 평균 투자액은 지난해 약 122억 원에서 올해 약 191억 원으로 56%가량 증가했다. 프레이저테라퓨틱스에 존슨앤드존슨 이노베이션과 플레이그라운드 글로벌 등이 참여했고 브리즈바이오 역시 세쿼이아캐피털 등이 참여한 투자 라운드를 통해 360억 원을 확보했다.
이미 투자자들에게 잘 알려진 기업들에게도 대규모 자금이 유입되고 있다. 국민성장펀드는 6월 항체약물접합체(ADC) 플랫폼 기업 리가켐바이오에 5000억 원을 투자했다. 리가켐바이오는 지금까지 누적 9조 6000억 원 규모의 기술수출 성과를 냈으며 확보한 자금을 후기 임상과 차세대 플랫폼 개발 등에 활용할 예정이다. 초기 기업 가운데서는 생명과학·화학 분야의 연구 가설을 만들고 검증하는 인공지능(AI)을 개발하는 아스테로모프가 420억 원 규모의 시드 투자를 유치했다.
업계에서는 올해 투자 회복세가 과거 바이오 투자 호황기와는 성격이 다르다고 보고 있다. 과거에는 디지털 헬스케어 등 업종과 투자 단계를 가리지 않고 초기 기업에도 광범위하게 자금이 공급됐다면 최근에는 임상 성과와 기술이전 가능성, IPO 가시성을 갖춘 기업에 대규모 자금이 집중되고 있다. AI·로봇 스타트업의 기업가치가 빠르게 높아지면서 상대적으로 투자 회수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는 바이오 기업으로 포트폴리오를 분산하려는 움직임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한 VC 부대표는 “바이오 투자 시장에 다시 자금이 들어오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과거처럼 업종과 투자 단계를 가리지 않고 공격적으로 투자하는 흐름은 아니다”며 “임상 성과나 기술력을 입증하고 IPO 등 다음 단계가 가시화된 기업을 중심으로 투자금이 몰리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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