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기 트리니티대학교 비즈니스스쿨 객원교수
ODA 65년간 5조弗 지원에도
대부분 선진국 진입에 실패
단순한 시혜성 원조는 한계
투명성·거버넌스·친환경 등
ESG원칙 조건 달아 제공돼야
우리나라는 기적처럼 개발도상국을 넘어 선진국으로 진입한 대표적인 나라가 됐다. 식민지와 전란의 폐허 속에서 일어선 '살아 있는 신화'로 개발경제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그 성공 경험은 수많은 개도국에 희망의 등불이 됐고 우리의 공적개발원조(ODA) 정책은 그 모델을 전수하는 데 주력해왔다. 우리의 눈부신 경제 발전은 우리 정부와 국민의 노력이 컸지만 선진국의 원조가 그 밑바탕이 됐다.
1961년 초 경제협력개발기구의 개발원조위원회(DAC) 출범 이후 2025년까지 개도국에 지원된 ODA 규모는 5조달러(현 시세로 15조~20조달러)로 추정된다. 이 막대한 자금 지원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개도국은 선진국 진입에 실패하고 여전히 개도국으로 분류되고 있으며 여러 아프리카 국가는 실질적인 변화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원조를 제공하는 방식과 제도에도 개선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우리는 지금 21세기 '디지털·인공지능(AI) 시대'에 살고 있다. 필자가 최근까지 한·아프리카재단 이사장으로 근무하며 현장에서 목도한 아프리카의 현실, 그리고 현재 아일랜드 트리니티대 비즈니스스쿨에서 연구하고 있는 21세기의 글로벌 경제 환경은 기존의 방식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다. 정보기술(IT)과 AI로 무장한 디지털 환경에서 전문가들이 책상 위에서 설계한 낡은 하향식(Top-down) 원조 계획은 그 적실성을 완전히 상실했다. 이제는 시혜가 아닌 '시스템'을, 원조가 아닌 '경제 주권'을 이야기해야 할 때다.
세계적인 경제학자 윌리엄 이스털리는 그의 저서 '전문가의 독재(The Tyranny of Experts)'에서 외부 전문가들이 기술적 처방을 통해 개도국의 빈곤을 해결하려 할 때, 오히려 현지 시민들의 정치적 권리와 시장의 자생력을 억압하는 결과를 낳았음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은 오늘날 더욱 유효하다. 21세기의 아프리카 청년들은 더 이상 외부 전문가가 가져오는 10년짜리 정부 주도 개발 계획을 기다리지 않는다. 스마트폰을 통해 글로벌 시장과 실시간으로 연결된 그들은 낡은 관료주의를 건너뛰어 '리프프로깅(Leap-frogging)' 성장을 꿈꾼다. 그런데도 여전히 과거의 ODA 문법은 계속되며 수혜국을 수동적인 객체로 머물게 하고, 부패한 권력과의 결탁이라는 고질적인 부작용을 낳고 있다. 이는 원조가 아니라 그들의 발전을 저해하는 또 다른 형태의 종속이다. 또 미래의 주역이 될 청년세대의 창업과 실물 경제활동의 괴리만 심화시키고 있다.
최근 아프리카의 일부 리더들은 선진국 주도의 ESG 규범이나 탄소배출 규제를 두고 "과거 자원을 수탈하던 서구 열강이 이제는 환경이라는 명목으로 성장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있다"며 소위 '기후 식민주의'라고 강하게 반발한다. 이러한 우려는 역사적 맥락에서 정당한 비판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에만 머문다면 개도국은 다시 한번 글로벌 표준의 희생자로 전락할 뿐만 아니라 타들어 가기 시작하는 지구라는 초가삼간을 다 태워버리고 공멸하는 지구촌 멸망의 공범자가 되는 것이다.
챗GPT
이제는 선진국이든 개도국이든 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지구촌 지키기와 경제적 번영의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 ESG는 선진국이 세운 높은 장벽이 아니라 개도국이 장기적인 '경제 주권'을 확보하기 위한 최단거리 '고속도로'가 될 수 있고 허물어지지 않는 견고한 경제 기반을 다져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낡은 원조는 공여국의 정치적 입맛에 따라 향방이 결정되지만, ESG라는 시장의 룰을 통과한 자본은 개도국의 실력에 기반한 '당당한 투자'이기 때문이다. ESG 표준을 수용하고 내재화하는 것은 단순한 규제 준수가 아니라 선진 금융 조달 기법과 투명한 자산관리 역량을 학습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치명적인 생존 전략이다.
유럽의 금융 생태계는 이미 이 방향으로 거대한 물줄기를 틀고 있다. 유럽연합(EU)의 '글로벌 게이트웨이' 전략은 민주적 가치, 투명성과 거버넌스, 파트너십, 친환경과 청정 등 원칙을 제시하며 지속가능한 인프라스트럭처 투자에 수천억 유로를 투입하고 있으며, 송도에 본부를 둔 녹색기후기금(GCF)과 유럽 각국의 임팩트 투자 펀드들은 ESG 성과를 담보로 자본을 공급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21세기 개발협력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우리의 ODA와 대외경제협력기금(EDCF)을 새로운 흐름에 맞춰 전면 재설계해야 한다.
첫째, ODA를 '혼합 금융'의 마중물로 활용해야 한다. 정부 재원은 민간 ESG 펀드가 개도국 진출 시 겪는 초기 리스크를 보전해주는 '지렛대'가 돼야 한다. 소액의 공적자금으로 거대 민간 자본을 유인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둘째, EDCF를 '지배구조(G) 혁신'의 도구로 삼아야 한다. 이제 차관은 단순한 도로·교량 건설이 아닌 해당 국가의 금융 투명성과 자산관리 능력을 높이는 소프트웨어 구축을 조건으로 제공돼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이 외부 지원 없이도 스스로 국가 자산을 운용하고 그 과실을 온전히 누릴 수 있고 나아가서 우리의 믿을 만한 경제적 파트너가 될 수가 있다.
대한민국은 이제 '과거의 성공 경험 전수자'라는 낡은 도그마에서 벗어나야 한다. 개도국 지도자들에게 ESG를 '지켜야 할 규제'가 아닌 '쟁취해야 할 경제 주권의 도구'로 설득할 수 있는 새로운 메커니즘을 제시해야 한다.
[여운기 트리니티대학교 비즈니스스쿨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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