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원성윤 기자] “주가가 떨어지면 주주들은 피눈물을 흘리지만, 오너 일가는 미소를 짓는다.”
한국 증시의 씁쓸한 격언이 최근 잇따른 기업들의 지분 증여 사태로 다시금 증명되고 있다. 주식 시장의 전반적인 침체나 개별 기업의 대형 악재로 주가가 곤두박질친 시기를 틈타, 오너 일가가 막대한 규모의 주식을 2·3세에게 넘기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현행 세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합법적 절세’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그 이면에는 소액 주주들의 막대한 손실을 방치하거나 심지어 악용한다는 짙은 도덕적 해이(모럴해저드)가 자리 잡고 있다.
상장 주식의 증여세는 증여일 전후 2개월씩 총 4개월간의 최종 시세 평균액을 기준으로 산정된다. 즉, 주가가 낮을 때 지분을 넘길수록 수백억에서 수천억 원에 달하는 세금을 합법적으로 덜어낼 수 있다. 오너 일가 입장에서는 기업의 가치가 훼손된 위기의 순간이 곧 경영권 승계의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둔갑하는 셈이다.
◇ ‘자사 악재’마저 승계 지렛대로…일양약품의 참담한 모럴해저드
가장 뼈아픈 비판을 받는 곳은 단연 일양약품이다. 정도언 전 회장은 지난 7월 장남 정유석 대표에게 170만 주를 증여하며 3세 승계를 사실상 마무리 지었다. 문제는 그 시점이다. 일양약품은 중국 합자법인 관련 분식회계 의혹이라는 초대형 악재로 반년 가까이 주권 매매가 정지됐고, 거래 재개 후에도 주가는 1년 새 48% 가까이 폭락했다.
기업의 내실이 무너지고 투자자들의 신뢰가 바닥을 친 상황을 틈타 오너 일가는 증여세를 절반 가까이 줄이는 혜택을 챙겼다. 이는 경영 실패의 책임을 져야 할 대주주가 오히려 자신의 과오로 빚어진 주가 하락을 승계의 지렛대로 삼았다는 점에서, 자본시장의 윤리를 근본적으로 훼손한 사례로 기록될 만하다.
◇ ‘조정장’ 틈탄 HD현대…합법과 주주 가치 사이의 괴리
최근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이 장남 정기선 HD현대 회장에게 지분 3.54%(280만 주)를 증여한 HD현대의 사례 역시 궤를 같이한다. HD현대의 주가가 고점 대비 약 30%가량 조정을 받은 시기에 전격적으로 증여가 이루어졌다. 예상 증여세만 3,000억 원 중반대에 달하는 초대형 승계 작업에서, 주가 하락기를 활용해 막대한 세금 부담을 덜어낸 것이다.
물론 HD현대의 경우 일양약품과 같은 내부 통제 실패로 인한 주가 폭락과는 결이 다르다. 하지만 글로벌 경기 침체 우려와 업황 변동성으로 주주들의 불안감이 고조된 시기를 ‘절세의 적기’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소액 주주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일반 투자자들에게 주가 하락은 자산의 축소와 고통을 의미하지만, 지배주주에게는 세금 할인 이벤트로 작용하는 극명한 대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근본 원인…제도적 보완 시급해
주가 하락기마다 반복되는 꼼수 증여는 단순한 촌극이 아니다. 이는 한국 증시의 고질적인 병폐인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를 유발하는 핵심 기제로 작동한다. 대주주가 주가 상승을 억제하거나, 심지어 주가 하락을 방관할 경제적 유인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주가가 오르면 승계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구조 속에서, 오너 일가가 진정성 있게 주주 환원 정책이나 기업 가치 제고(밸류업)에 나설 것이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결국 오너 일가의 이익과 일반 주주의 이익이 상충하는 이 기형적인 지배구조를 타파하지 않는 한, 정부가 부르짖는 자본시장 선진화는 공염불에 불과하다. 증여세 산정 기준 기간을 대폭 늘리거나, 대주주의 경우 기업의 장기적인 내재 가치나 순자산가치를 병행 평가하여 세금을 부과하는 등 세법의 구조적 맹점을 보완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개미들의 눈물을 자양분 삼아 덩치를 키우는 꼼수 승계가 멈추지 않는 한, 한국 자본시장의 봄은 요원하다. socool@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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