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중앙 주교좌 성당 레지오 단원들과 함께한 가을 순례… 최양업 신부의 땀과 순교자들의 기도 속에서 다시 깨닫는 믿음과 사랑
[스포츠서울 | 글·사진 이상배 전문기자] 가을은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계절이다. 산자락마다 붉고 노란 단풍이 내려앉고, 황금빛 들녘에는 따스한 햇살이 머문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과 발밑에서 사각거리는 낙엽 소리마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그 가을날, 국군중앙 주교좌 성당 레지오 단원들과 함께 충북 진천의 배티성지를 찾았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자리한 성지는 평화로웠지만, 그곳에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았던 선조들의 눈물과 기도, 그리고 숭고한 희생의 역사가 깊이 새겨져 있었다.
이번 순례는 단순히 성지를 둘러보는 시간이 아니었다. 과거의 믿음을 만나고, 오늘의 나를 돌아보며, 앞으로 살아갈 사랑의 길을 생각하는 여정이었다.
△ 깊은 산골에 피어난 믿음의 역사
배티는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시대, 신자들이 숨어 살며 신앙을 지켜낸 교우촌이다. 삼박골과 은골, 새울 등 인근 골짜기에도 신앙공동체가 형성됐다.
신자들은 낮에는 생계를 위해 일하고 밤에는 함께 모여 기도하며 믿음을 이어갔다.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서로 의지하며 신앙을 지켜낸 것이다.
지금은 평화롭기만 한 이 산골에서 그들은 얼마나 많은 밤을 두려움과 기도로 지새웠을까. 사랑하는 가족과 고향을 떠나야 했던 아픔 속에서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들의 삶을 생각하니 절로 숙연해졌다.
우리는 자유롭게 기도하고 미사에 참례할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간다. 그렇기에 문득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이 소중한 신앙의 자유에 얼마나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배티의 고요한 산길은 말없이 오늘의 우리에게 믿음의 의미를 되묻고 있었다.
△ 최양업 신부의 땀으로 이어진 복음의 길
배티성지를 이야기하면서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빼놓을 수 없다. 한국 천주교회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는 12년 동안 전국 곳곳의 120여 개의 교우촌을 찾아다니며(약 7천리, 2800km) 신자들을 돌보고 복음을 전했다. 험준한 산길과 박해의 위험도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배티는 그의 사목 활동과 깊은 인연을 지닌 곳이다. 1850년 무렵 마련된 소박한 초가집은 성당과 사제관, 신학생들의 배움터 역할을 하며 조선인 성직자 양성의 중요한 출발점이 됐다.
최양업 신부는 흔히 ‘땀의 순교자’로 불린다. 피를 흘리는 순교뿐 아니라 평생 자신을 내어주는 헌신 역시 위대한 신앙의 증거임을 그의 삶이 보여준다.
그의 발자취를 떠올리며 사랑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친 동료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지 않는 마음,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책임을 다하는 자세에도 사랑은 살아 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군 공동체의 삶 역시 이러한 정신과 맞닿아 있다.
△ 순교자들 앞에서 되새긴 믿음
숲길을 따라 십자가의 길과 순교자 묘역으로 향했다. 가을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들고 낙엽이 흩날리는 가운데 단원들의 발걸음도 자연스레 느려졌다.
순교자들의 묘 앞에 서자 마음이 숙연해졌다. 그들도 누군가의 부모였고 자녀였으며, 평범한 일상의 행복을 꿈꾸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믿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았다. 그 앞에서 다시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내가 믿는 가치를 일상에서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가.’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은 그들의 희생을 기리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이 보여준 사랑을 오늘 우리의 삶으로 이어가는 일일 것이다.
고통받는 이의 곁에 머물고, 외로운 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서로의 짐을 나누어 지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가 걸어가야 할 믿음의 길이다.
△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나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번 순례에서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말씀이 있다. 배티성지 최문석 안드레아 주임신부의 강론 중 들었던 말씀이다.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나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누구나 부족하다. 때로는 흔들리고 넘어지며, 사랑해야 할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의 문을 닫을 때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기다려 주신다.
신앙은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은총 안에서 조금씩 성장해 가는 여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께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듯 나 역시 자신과 이웃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다시 일어서고, 다시 용서하고, 다시 사랑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일상에서 실천해야 할 진정한 믿음일 것이다.
특히 단원들과 함께 걸으며 기도했던 시간은 더욱 뜻깊었다. 공동체란 서로의 부족함을 감싸주고 함께 희망을 나누는 존재임을 다시 느꼈다.
△ 순례는 끝나도 사랑의 길은 계속된다
성지를 떠나는 길, 황금빛 들녘과 붉게 물든 산자락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아침에 바라보았던 풍경과 다르지 않았지만, 마음속에는 새로운 다짐이 자리하고 있었다.
순교자들은 목숨을 바쳐 믿음을 지켰고, 최양업 신부는 평생의 땀으로 사랑을 실천했다. 이제 우리도 각자의 삶 속에서 그 믿음을 이어가야 한다.
가족에게 조금 더 따뜻하게 다가가고, 동료에게 먼저 손을 내밀며, 어려운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것. 아직 부족하더라도 오늘보다 내일 조금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배티성지가 우리에게 남긴 소중한 가르침이 아닐까.
순례는 성지를 떠나는 순간 끝나는 것이 아니다. 가정과 일터, 이웃이 기다리는 일상의 자리에서 새로운 순례가 시작된다. 가을빛에 물든 배티의 산길에서 우리는 과거의 순교자들을 만났지만, 결국 오늘의 자신을 돌아보았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더 기도하고, 부족하기에 더 사랑하며,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서는 삶. 다음에 다시 배티를 찾는 날에는 지금보다 조금 더 따뜻한 사람이 되어 있기를 소망한다.
우리의 기도가 삶의 행동으로 이어지고, 작은 사랑이 누군가에게 희망과 위로가 되기를 기도한다. 순례는 끝나도 사랑의 길은 계속된다. sangbae0302@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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