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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사랑’을 가능케 한 조인성…더할나위 없는 2026년의 마침표

이창동 감독이 8년 만에 내놓은 신작 ‘가능한 사랑’이 23일 베일을 벗었습니다.

배우 조인성

이창동 감독이 8년 만에 내놓은 신작 ‘가능한 사랑’이 23일 베일을 벗었습니다.

러닝타임 164분. 해고 노동자의 이야기. 올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는 소식도, 대중들 입장에서는 “재미보다 의미에 방점을 찍는 영화제용 영화”라고 오히려 선택을 꺼리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섣부른 판단이라고 미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가능한 사랑’은 넷플릭스 영화입니다. 오는 11월 공개되는데, 이에 앞서 추석 연휴를 앞두고 딱 2주 간만 극장에 걸립니다.

“왜 그럴까?” 궁금해질 수밖에 없죠.

그런데 164분 동안 ‘가능한 사랑’을 뚝심있게 보고 나면 “이건 극장에서 봐야 하는 영화가 맞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26년 전, 장편 데뷔작인 ‘박하사탕’으로 인간의 심연을 저 밑바닥까지 훑은 뒤, 굳이 길어 올려 그 속내를 커다란 스크린에 널어놓았던 ‘클래식 이창동’의 귀환이라는 할 만합니다.

영화 ‘가능한 사랑’

이야기 구조는 단순합니다. 해고 노동자 부부와 그들을 취재하는 다큐멘터리 감독 부부가 주인공이죠. 호석(설경구)·미옥(전도연)은 대기업 SP중공업 해고 노동자 부부입니다. 호석은 부당 해고에 맞서 옥쇄파업에 들어갔다가 경찰 특공대의 무자비한 진압에 쓰러졌고, 그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갑니다. 순진하고 성실한 미옥은 “오늘 저녁 뭐 먹지?”를 고민하며 남편 곁을 든든히 지키는 아내죠. 그런 그들의 삶 속으로 예지(조여정)가 들어옵니다. 노동 문제에 누구보다 관심이 많은 그는 진심으로 미옥에게 다가가고, 미옥은 곁을 내줍니다. 그리고 한사코 다큐멘터리 인터뷰를 거부하던 호석을 카메라 앉히게 되죠.

각각을 연기하는 배우 설경구, 전도연, 조여정의 연기는 가히 압도적입니다. ‘연기를 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마치 그 삶을 살아온 사람들처럼 스크린 안에서 숨을 쉬죠.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예지의 남편, 배우 조인성이 맡은 상우에게 더 눈이 갔습니다.

자상한 남편인 상우는 항상 포르쉐를 몰고 수시로 아내를 데리러 옵니다. 다들 그의 직업을 궁금해하죠. 주변이들은 “할아버지 때부터 잘 살았고, 전문 경영인에게 회사를 맡긴 후 금융 자본가로 일한다”고 설명합니다.

빼어난 외모에 포르쉐를 타고, 술도 마시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미소를 건네는 남자. 아내를 끔찍하게 아끼고 자신의 부(富)를 과시하지 않으며 항상 베푸는 자세를 취하는 상우는 ‘백마 탄 왕자’의 실사판이라 할 만합니다.

하지만 온기가 느껴지는 상우의 피는, 사실 그 누구보다 차갑습니다. 노동 다큐멘터리를 “잘 찍고 싶다”는 아내에게 상우는 미소를 지으며 묻죠.

“너하고 저 사람들은 다른데, 공감하려고 노력하고 있잖아. 그거 메소드 연기잖아.”

예지는 딱히 반박하지 못합니다. 이미 상우는 모든 판을 읽고 있고, 선민 의식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셈이죠.

‘가능한 사랑’에서 달은 중요한 메타포입니다. 어린 미옥은 무작정 상경 후 봉제 공장에서 일하고,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 미옥을 찾아온 호석은 함께 인천 월미도로 향하죠. 그 자리에서 둘은 달을 함께 바라봅니다. 같은 곳을 보며 희망을 키운 것이죠.

이 이야기를 들은 예지도 공감한다는 듯 자신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미국 시카고 유학 시절, 아르바이트하는 가게에 지갑을 두고 나와 숙소까지 걸어올 수밖에 없었는데 그 때 무서워하는 자신을 달이 비추어줬다는 거였죠.

예지는 두 상황을 두고 “같은 달”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예지와 미옥이 처한 상황은 지구와 달의 거리만큼이나 멉니다. 그리고 ‘포장된 친절’을 표피로 두른 상우는 누구보다 먼저 이런 상황과 관계성을 간파하고 있죠.

영화 ‘가능한 사랑’

‘가능한 사랑’에서 상우는 항상 물리적으로 상위 포지션을 점합니다. 높은 자리에서 상대를 내려다 보는 형국이죠.

특히 가장 순수한 노동자인 미옥과 가장 냉철한 자본가인 상우의 관계는 참 묘합니다. 하필 미옥은 상우의 포르쉐 앞에서 남편이 준 반지를 떨어뜨리는데요. 포르쉐 아래로 반지가 들어가지 않았나 싶어 차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미옥, 그런 미옥을 서서 내려다 보는 상우의 구도는 두 사람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또 인상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길 하나를 두고 영어로 비즈니스 통화를 하는 상우와 술에 취한 채 바닥에 담배를 비벼끄는 미옥의 모습이 한 프레임에 담기는데요.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길은 고작 다섯 발자국 정도지만, 거대한 스크린 속 두 사람 사이의 간극은 도무지 닿을 수 없을 만큼 멀어 보입니다.

감독은 요리사입니다. 새로운 요리(영화)를 내놓기 위해 메뉴(소재)를 정하고, 그에 걸맞은 재료(배우)를 준비하죠. ‘가능한 사랑’의 재료는 모두 훌륭하고 레시피도 빼어난데, 특히 이 감독이 왜 상우 역에 조인성을 배치했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습니다.

상우는 ‘가능한 사랑’에서 감정의 기복이 가장 작은 인물입니다. 굳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도 그의 자본이 주변을 발빠르게 움직이게 만들기 때문이죠. 그래서 대사량도 적지만 조인성은 몇 가지 상징적 몸짓과 말투 만으로도 상우가 가진 ‘본 투 비(born to be) 자본가’의 기질을 한껏 드러냅니다.

큰 키가 한 몫하죠. 웬만한 상황에서 그는 상대방을 내려다 보게 됩니다. 이 감독은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앙각 쇼트를 통해 조인성이 가진 물리적 장점을 활용하는데요. 이 때 조인성은 턱을 살짝 드는 디테일로 상우가 가진 우월감을 극대화합니다.

파업의 후유증으로 온 몸에 찬 울분을 쉽사리 떨치지 못하던 호석은 예지의 카메라 앞에서 참고 참다가 입을 뗍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속에 있는 말을 다 하면 눈앞에 있는 사람을 다 죽일 것 같다.”

인간은 그런 존재입니다. 한과 독기를 품고 있더라도, 겉으로 이를 쉽게 드러내지 않고 감추죠.

이는 상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포장된 친절’을 걷어내고 노동자 계급을 향해 견지하고 있는 속내를 모두 토해낸다면 이 세상은 복마전이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가능한 사랑’에서 조인성은 그런 상우의 맨 얼굴을 기가 막히게 포착하고, 또 표현합니다.

올해 조인성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배우였죠. ‘휴민트’로 포문을 열었고 ‘호프’로 또 한번 주목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가능한 사랑’입니다.

‘가능한 사랑’은 엄밀히 말해 ‘이창동의 영화’죠. 큰 그림을 그린 이 감독은 설경구, 전도연, 조인성, 조여정으로 아귀가 딱 들어맞는 마스터피스를 완성했고, 조인성은 그 안에서 군더더기 없는 조각으로 기능했습니다.

단언컨대 조인성은 ‘가능한 사랑’으로 2026년 그의 필모그래피에 더할 나위 없는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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