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경제신문 = 정창현 기자] SK하이닉스가 글로벌 빅테크들의 잇따른 자금 지원 제안에도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협상 구도가 공급자 중심으로 급격히 기울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과거에는 고객사가 가격과 물량 협상에서 우위에 있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공급사가 고객의 투자 제안을 가려 받는 이례적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11일 업계에 따르면,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최근 SK하이닉스에 전용 메모리 생산라인 투자, ASML EUV 노광장비 구매 자금 지원, 30~40% 수준의 선급금 지급, 연간 가격 상·하한선을 설정하는 가격 밴드 메커니즘 등 다양한 형태의 제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일부 제안은 SK하이닉스가 구축 중인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1기 팹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D램 생산이 중심인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SK하이닉스는 이같은 제안들을 즉각 수용하기보다 구조적 리스크와 사업 유연성을 함께 검토하는 분위기다. SK하이닉스는 “기존 장기계약과 다른 다양한 접근법과 구조적 대안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업계에서는 이번 사안의 핵심을 ‘빅테크의 투자 의지’보다 ‘SK하이닉스의 태도 변화’에 두고 있다. 메모리 산업은 그동안 극심한 업황 변동성을 겪으며 공급사들이 고객사와의 다년 계약 확보에 적극적인 구조였다. 하지만 AI 데이터센터 확산으로 메모리 수요가 폭증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는 평가다. 고객이 먼저 선급금과 투자 조건을 제시해도 공급사가 계약 조건을 선별적으로 검토하는 구조 자체가 과거와는 다른 시장 권력 관계를 보여준다는 해석이다.
업계 관계자는 “예전에는 메모리 업체들이 가격 하락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장기 계약 확보에 더 적극적이었다면, 지금은 고객사들이 오히려 수급 안정성을 확보하려고 먼저 움직이는 분위기”라며 “AI 서버 투자 경쟁이 커질수록 메모리 공급사의 전략적 중요성도 함께 올라가고 있다”고 말했다.
SK하이닉스의 HBM4 [사진=SK하이닉스]
특히 업계는 SK하이닉스가 고객 자금을 반드시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한다. SK하이닉스는 HBM 시장 점유율 우위를 기반으로 대규모 현금흐름을 창출하고 있으며, AI 메모리 공급 부족 상황까지 겹치면서 협상력이 크게 강화된 상태다. 이 때문에 특정 고객의 자금 지원에 의존할 유인이 크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회사 입장에서는 특정 고객의 투자금을 수용할 경우 공급 물량과 가격 측면에서 장기적인 제약이 발생할 가능성도 부담 요인으로 꼽힌다. 자금 지원을 받을 경우 특정 고객에 물량이 묶이거나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 조건을 받아들여야 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단순한 자금 조달보다 향후 공급 유연성과 고객 포트폴리오 유지가 더 중요하다는 시각이다.
실제로 메모리 계약 구조도 변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지난달 1분기 실적발표 컨퍼런스콜을 통해 “현재 공급 제약 상황에서 모든 고객 요청을 수용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장기계약으로 물량을 확보하려는 고객 요청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삼성전자 역시 최근 일부 고객과 체결한 장기계약이 “구속력 있는(binding) 형태"라고 언급했다. 단순 단가 협상을 넘어 공급 우선권과 물량 확보 자체가 핵심 경쟁 요소로 부상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같이 빅테크들이 이례적인 조건까지 제시하는 배경에는 AI 인프라 투자 경쟁이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올해 CAPEX가 1900억 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밝혔으며, 이 가운데 250억 달러는 메모리 등 부품 가격 상승 영향을 반영한 금액이라고 설명했다. 메타 역시 “미래 캐파 확보를 위해 공급망 전반에 걸친 거래를 진행 중”이라고 언급했다. AI 서버 확대 경쟁이 메모리 확보 경쟁으로 직결되면서, 과거 CPU·GPU 중심이던 협상력이 HBM 등 메모리 영역으로 이동하는 모양새다.
다만 가격 상·하한선 계약이나 대규모 선급금 지급 같은 구조가 실제 계약으로 이어질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메모리 업계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인 만큼 회계 처리와 매출 인식 기준, 특정 고객 편중 논란, 규제 이슈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업계 한 관계자는 “AI 메모리 수요가 워낙 빠르게 늘다 보니 특정 고객과 지나치게 밀착된 구조를 만드는 데 부담을 느끼는 분위기도 있다”며 “향후 고객 다변화나 공급 전략 측면까지 함께 고려하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Tag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