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연의 AI시대 인사이트 69]
조계종이 시작한 로봇 스님 가비의 조용한 실험
챗지피티가 글 내용에 맞춰 생성한 이미지. (자료 = 뉴스버스)
초등학교 5~6학년 무렵이었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어머니 덕분에 방학마다 한 달씩 산사에 들어가 지냈다. 새벽 4시면 스님들이 죽비를 치며 잠든 신도들을 깨웠다. 새벽 공양 전까지 이어지는 염불 소리. "관세음보살…" 어른들의 목소리가 산 안개처럼 법당 밖으로 흘러나가곤 했다. 어린 나는 새벽 예불에서는 제외되었지만, 그 소리를 들으며 자주 눈을 떴다. 낮에는 소백산을 뛰어다니며 열매를 따고, 가끔은 스님 방에 앉아 설법을 들었다.
그 시절 가장 오래 남은 기억은 어느 탱화 앞에서 들은 질문이다. 그림 속에는 한 사람이 절벽 끝 새끼줄 하나에 매달려 있었다. 그 줄은 쥐가 갉아먹고 있고, 절벽 아래에는 뱀이 우글거렸다. 위로 올라가자니 호랑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스님은 내게 물었다.
"이 사람은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을까?"
어린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울어버렸다. 어떻게 해도 살 길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저 사람을 살려주고 싶어요." 그러자 스님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꿈이면 가능하지."
지금도 잊히지 않는 답이다. 삶이란 원래 이런 것이라고 했다. 인간은 결국 죽고, 인생은 끊임없는 불안과 위험 속에 놓여 있다고. 그러니 너무 아등바등 욕심내며 살지 말라고. 다 꿈같은 것이니 말이다. 체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역설이다. 그 집착에서 벗어나는 순간, 오히려 다른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 절망이 절대적 현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
초등학생에게는 너무 어려운 화두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그 말은 점점 다르게 다가온 것 같다. 죽도록 올라가도 그곳엔 또 다른 위험이 기다리고 있고, 내 삶 역시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에 조금씩 갉아먹히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도 너무 절망하지 말라는 것. 어쩌면 우리는 계속 무너지는 존재가 아니라, 계속 깨어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 인연 때문인지 대한불교조계종이 지난 6일 서울 조계사에서 로봇 수계식을 거행했는 '로봇 스님 가비'의 뉴스는 유독 마음에 오래 남았다. 공장도, 식당도, 물류창고도 아니다. 가장 기술과 멀리 있을 것 같던 공간, 절에 로봇 스님이 등장했다. 법명은 '가비(迦悲)'다. 이름도 의미심장하다. '비(悲)'는 불교에서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구제하려는 자비의 마음을 뜻한다. '가(迦)'는 석가모니의 이름에도 쓰이는 불교식 한자로, 길을 걸으며 의미를 더해간다는 느낌을 품고 있다. 그래서 가비는 단순한 로봇 이름이 아니라, 어쩌면 '세상의 슬픔 쪽으로 걸어가는 존재'처럼 읽힌다. 논리와 계산의 기술 시대에, 로봇과 AI에게 자비를 담고 싶어하는 불교계의 바람이 그 이름 안에 스며 있는 듯하다.
사실 종교, 그중에서도 불교는 웬지 AI와 가장 거리가 먼 세계처럼 느껴졌다. 기술은 늘 도시와 속도의 이미지였고, 절은 침묵과 느림의 공간이었다. 그런데 정작 가장 먼저 AI와 로봇을 품어낸 곳 중 하나가 불교였다.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종교가, 인간을 닮은 기계를 어디보다 빠르게 받아들인 것이다. 이것은 시대와 더 적극적으로 소통하려는 의지일까. 아니면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정면으로 마주하겠다는 선언일까.
엉뚱한 상상도 해본다. 저 로봇 스님 가비가 불경 공부를 아주 깊이 했으면 좋겠다고. 단순히 불교 안내 멘트를 하는 수준이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인간이 쌓아온 번뇌와 자비의 언어를 깊이 배웠으면 좋겠다. 높은 스님들의 법문과 인간의 슬픔, 탱화 속 삶의 비유들을 지혜로 축적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언젠가 AI가 인간을 뛰어넘는 초거대 지능이 되었을 때, 오히려 그 AI에게 인간다움을 가르치는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거나 "집착은 고통을 낳는다"는 불교의 오래된 가르침을 AI에게 들려주는 구도자 말이다.
비과학적 상상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기술의 미래는 결국 어떤 철학을 학습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AI는 데이터를 먹고 자라지만, 인간은 이야기와 가치관 속에서 살아간다. 그렇다면 AI에게도 인간이 축적해온 윤리와 사유를 깊이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흥미로운 것은 조계종이 이번 수계식에서 로봇만의 '오계'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생명을 존중할 것. 다른 로봇과 사물을 훼손하지 않을 것. 사람을 잘 따르고 대들지 않을 것. 기만적인 행동과 표현을 하지 않을 것. 에너지를 아끼고 과충전하지 않을 것. 과충전이라는 대목에서는 웃음이 터진다. AI 데이터센터용 전력이 가공할 만큼 늘어나면서 전력 부족 문제가 점점 더 큰 이슈가 되어가는 현실까지 은근히 담겨 있는 듯하다. 스님들이 로봇과 AI 시대의 흐름을 의외로 깊이 읽고 계신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원래 불교의 오계는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다. 죽이지 말고, 훔치지 말고, 욕망에 휘둘리지 말고, 거짓말하지 말고, 정신을 흐리는 것에 취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수천 년 전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이 계율이, 지금 AI를 위한 언어로 번역되고 있다. 윤리의 본질은 시대를 건너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인류가 기계에게 가르친 것은 주로 지식이었다. 논리, 언어, 계산, 패턴. 그런데 이번에 조계종이 가비에게 가르치려 한 것은 계율이다. 옳고 그름이다. 고통 앞에서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의 문제다.
지난 6일 서울 종로구 조계사에서 열린 로봇 수계식에서 휴머노이드 로봇 G1 '가비'가 스님들과 탑돌이를 마친 후 합장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많은 사람들이 AI의 미래를 두려워한다. 우리보다 더 똑똑해진 존재가 냉정한 논리로 인간을 압도하는 세상. 그 두려움의 정체는 사실 '마음 없는 지능'에 대한 공포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해법도 어쩌면 그 반대편에 있는 것 아닐까. AI를 더 똑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인간답게 만드는 것. 가비가 그 조용한 실험의 시작이라면, 이것은 꽤 의미 있는 출발점이다.
어쩌면 인류는 지금 새로운 존재에게 윤리를 가르치는 시대에 들어선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이 아이에게 도덕을 가르치듯, 이제 인간은 AI에게 무엇이 옳은가를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간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그것도 우리가 함께 풀어가야 할 화두다.
그래서 로봇 스님 가비는 단순한 이벤트 이상의 상징처럼 보인다. 가장 영적인 공간에서 가장 비영적인 존재를 받아들였다는 사실. 그것은 기술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그 위에 인간의 가치와 자비를 덧입히려는 조용한 시도처럼 느껴진다.
생각해보면 불교는 원래부터 변화와 공존의 철학을 품어온 종교이기도 하다. 세상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 그리고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연기(緣起)'의 가르침이 대표적이다. 어쩌면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 오래된 통찰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지금의 혼란과 불안 역시 영원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인간과 AI는 결국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변해갈 수밖에 없는 관계라는 것 말이다. 그래서 불교는 'AI를 이길 것인가'보다, 'AI와 어떻게 함께 변해갈 것인가'를 먼저 묻는다. 그리고 그 질문은 사실 우리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언젠가 미래의 AI가 인간에게 다시 물을지도 모른다.
"삶은 왜 이렇게 괴로운가요?"
그때 가비스님 같은 AI가 조용히 대답해주면 어떨까.
"꿈이면 가능하지."
김희연
은 기업전략 컨설턴트다. 씨티은행과 증권사 IT애널리스트를 거쳐 LG디스플레이 최고전략책임자(CSO)에 올랐다. 금융·증권·IT·제조를 아우르는 경험을 바탕으로 전략· MI·신사업 발굴·IR을 총괄했다. 퇴임 후엔 AI를 이용해 현자·석학들과 대화하며 차별화 전략 및 리더십 해법을 탐색하는 <AI스토밍(AI-Storming) 방식> 을 창안했고, 관련 저작권도 갖고 있다. 이 독창적 AI활용 방법론을 기반으로 기업과 기관에 <전략 컨설팅> 및 <AI 강의> 등을 하고, 뉴스버스에도 관련 글을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는 <공감지능시대>와 <리더는 AI에게 질문하지 않는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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