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늦은 시간,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도시에 도착했다고 상상해보자. 스마트폰을 켜면 파란 화살표가 현재 위치를 정확히 가리키고, “300미터 앞에서 우회전입니다”라는 안내가 나온다. 우리는 길을 잃지 않고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놀라운 기술이었던 내비게이션이 이제는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개인의 이동에는 이렇게 똑똑한 내비게이션이 있는데, 정작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은 아직 없다. 아이 울음소리가 줄어드는 지역에 큰 예산을 들여 학교를 짓고, 사람이 줄어드는 골목에 청년 창업을 지원하는 일이 반복된다. 정책을 시행한 뒤 문제가 드러나면 그제야 수정한다. 자동차는 내비게이션을 따라 정확하게 목적지를 찾아가는데, 사회는 여전히 지도 없이 길을 찾고 있는 셈이다.
대구신문 창간 30주년을 맞아 이제는 우리 사회에도 ‘사회 내비게이션’을 달아야 한다고 제안하고 싶다.
◇왜 지금 ‘사회 내비게이션’인가
AI 시대는 곧 데이터의 시대다. 인공위성은 지구의 변화를 촬영하고, 행정기관은 인구·소득·고용·소비 등의 통계를 축적한다. 통신과 신용카드 데이터는 사람들의 이동과 소비 흐름까지 보여준다.
문제는 데이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데이터들이 기관마다 서로 다른 형식으로 흩어져 있다는 데 있다. 예를 들면 자동차에 GPS는 달려 있지만 그 좌표를 지도 위에 표시하고 목적지까지 안내하는 시스템이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데이터를 더 많이 모으는 것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위성영상·지리정보·통계 데이터를 동일한 좌표 위에 연결하고 융합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지금 이 방향으로 가면 5년 뒤, 10년 뒤 우리 지역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미리 보여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회 내비게이션이다.
자동차에는 내비게이션 있지만
사회 정책은 지도 없는 길 반복
산업·재정 등 현재 위치 ‘좌표화’
사후 대처에서 선제 대응으로
사회 내비게이션은 지역의 미래를 신호등처럼 보여줄 수 있다. 인구 감소가 심각한 곳은 ‘빨간불’, 청년 유입이 멈춘 지역은 ‘노란불’, 발전 가능성이 높은 곳은 ‘파란불’로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면 실패한 정책을 사후에 고치는 것이 아니라, 실패하기 전에 방향을 바꿀 수 있다.
개인의 시행착오는 경험이 될 수 있지만 사회의 시행착오는 세금과 시간, 그리고 청년들의 기회비용으로 돌아온다. 지방소멸이 빠르게 진행되는 지금, 우리는 더 이상 같은 실수를 반복할 여유가 없다.
◇자동차 내비게이션의 원리, 사회에 그대로 옮겨보면
자동차 내비게이션은 출발지와 목적지의 좌표를 확인하고, 도로망과 현재 교통상황을 분석해 가장 적절한 경로를 찾아낸다. 교통체증이 생기면 새로운 길을 다시 계산한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한 지역의 인구·산업·상권·재정 등을 현재의 ‘위치’로 좌표화하고, 지난 수십 년간의 변화 속도를 분석하면 미래의 모습을 상당 부분 예측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령인구가 계속 증가하는 지역이라면 몇 년 뒤 어떤 수준의 고령사회가 될지 예측할 수 있다. 특정 상권의 매출이 계속 감소한다면 앞으로 어떤 업종이 살아남을지도 미리 가늠할 수 있다.
자동차 내비게이션이 목적지까지 가는 길을 보여준다면, 사회 내비게이션은 우리 사회가 도달하게 될 미래의 목적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위성·지리·통계 겹쳐 지도 구축
인구부터 자율주행·재난대응 등
디지털 트윈으로 정책 우선 검증
일자리 생산으로 청년 정착 유도
◇위성·지리정보·통계의 융합이 만드는 살아있는 디지털 트윈
사회 내비게이션을 현실로 만드는 핵심은 ‘융합’이다. 위성영상은 토지와 건물, 녹지와 개발의 변화를 보여준다. GIS는 도로와 행정구역, 상권 등의 공간정보를 좌표로 담는다. 통계는 인구·소득·고용·소비의 변화를 숫자로 보여준다.
이 세 가지 데이터를 동일한 좌표체계 위에 겹쳐놓으면 현실과 거의 같은 가상의 세계가 만들어진다. 이것이 살아 있는 디지털 트윈이다.
디지털 트윈의 가장 큰 장점은 정책을 시행하기 전에 가상공간에서 먼저 실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청도의 어느 마을에 청년 창업 지원을 집중하면 실제로 인구가 유입될까? 대구의 산업단지를 재편하면 교통과 상권, 지역경제에는 어떤 변화가 나타날까? 이런 질문을 현실에서 수십억 원을 들여 실험할 필요가 없다. 먼저 가상공간에서 실험하고 실패와 성공을 확인한 뒤 현실에 적용하면 된다. 현실에서 실패하기 전에 가상세계에서 먼저 시험해 보는 것, 이것이 디지털 트윈(Twin)을 기반으로 한 사회 내비게이션의 핵심이다.
◇좌표 위의 디지털 트윈, 자율주행을 넘어 모든 분야로
정밀한 좌표 위에 현실을 그대로 옮겨놓는 기술은 정책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자율주행차가 안전하게 달리려면 도로와 차선을 정밀하게 표시한 고정밀 지도가 필요하다. 여기에 차량과 드론의 카메라, GPS(Global Positioning System) 등을 결합하면 실제 도로의 모습을 가상공간에 재현할 수 있다
교통뿐만 아니라 재난 대응, 스마트 물류, 로봇, 스마트시티 등에도 같은 원리를 적용할 수 있다. 결국 사회 내비게이션을 위해 구축하는 좌표·지리정보·통계의 융합 인프라와 자율주행을 위한 정밀지도는 같은 뿌리를 갖는다.
현실을 좌표 위에 정확하게 옮겨놓을 수 있다면 하나의 데이터 인프라가 인구정책에도, 자율주행에도, 재난 대응에도 활용될 수 있다. 대구가 이러한 좌표 인프라의 거점이 된다면 정책 내비게이션의 도시를 넘어 자율주행·로봇·스마트시티가 함께 성장하는 데이터 도시로 발전할 수 있다.
◇사회 내비게이션이 여는 미래 - 정밀한 예측과 청년의 새 일자리
사회 내비게이션은 미래를 예측하는 시스템에 그치지 않는다. 새로운 산업과 일자리도 만들어낸다. 위성영상을 분석하는 전문가, GIS 엔지니어, 통계와 AI 모델을 개발하는 데이터 과학자, 시뮬레이션 결과를 정책으로 연결하는 전문가가 필요하다. 즉 사회 내비게이션은 거대한 미래 산업이자 청년 일자리 플랫폼이 될 수 있다.
지방도시가 인구 유출을 걱정하며 손을 놓는 대신, 지역 데이터를 가장 잘 활용하는 데이터 산업의 중심지가 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대구가 위성영상·지리정보·통계를 융합하는 ‘데이터 수도’로 성장한다면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떠나지 않고도 데이터 국제 표준화를 통하여 세계적인 데이터 산업에 참여할 수 있다.
더 정확한 예측은 불필요한 예산 낭비를 줄인다. 절약된 재원은 다시 청년 창업과 지역혁신에 투자할 수 있다. 예측→절약→투자→일자리→정착→성장이라는 선순환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회 내비게이션은 단순한 행정 시스템이 아니다. 지방소멸 시대에 지역과 청년의 미래를 지켜주는 공공의 나침반이다.
정밀 예측으로 낭비 줄인 예산
청년 창업·지역 혁신에 투자를
AI 기반 기술 필요한 곳 배치
현대판 ‘홍익인간’ 실현의 길
◇홍익인간의 길, 그리고 모두가 행복한 세상으로
사회 내비게이션의 궁극적인 목적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다.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품어온 이상인 홍익인간, 즉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정신은 소수만의 발전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잘사는 세상을 지향한다. 이 정신은 대한민국에만 머물 이유는 없다.
아프리카, 동남아 등 대부분의 개발도상국에서는 아직도 의료서비스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나라도 수도권에는 의사가 몰려 있지만 농어촌 지역에는 의료진이 턱없이 부족한 경우가 있다. 이런 문제 역시 데이터를 좌표화하면 어디에 의료시설이 부족하고, 어느 지역에 의료서비스를 우선 배치해야 하는지를 보다 정확하게 찾을 수 있다.
AI와 원격의료 기술을 결합한다면 의사가 부족한 지역에 의료 자원을 더욱 효율적으로 배치할 수도 있다. 결국 사회 내비게이션은 가장 필요한 곳에 가장 먼저 자원을 보내는 기술이 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한 기술혁신이 아니라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의 정신을 오늘의 AI 시대에 구현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AI 시대의 인류는 지금 갈림길에 서 있다. 데이터를 소수가 독점하고 감시와 통제에 이용한다면 AI는 새로운 어둠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데이터를 모두의 미래를 예측하고 서로 상생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한다면 AI는 인류를 오랜 시행착오에서 벗어나게 하는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다. 사회 내비게이션은 바로 그 갈림길에서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를 알려주는 미래의 나침반이다. 시행착오를 줄이고, 청년에게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며, 지역과 세대가 함께 성장하는 길, 그 길 끝에는 우리가 오랫동안 꿈꾸어온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있을 것이다.
대구신문이 지난 30년 동안 대구와 경북의 목소리를 담아 지역과 함께 걸어왔듯, 앞으로의 30년도 우리지역과 대한민국이 더 나은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기를 기대한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데이터가 아니다. 데이터를 연결하고, 미래를 예측하고, 더 나은 길을 선택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AI 시대의 진정한 내비게이션은 자동차와 도로만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미래와 인류의 미래까지 안내하는 사회 내비게이션이어야 한다.
조덕호 대구대학교 명예교수·지구촌정신문화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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