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발하는 수요와 커지는 공급 리스크, AI 반도체 시장의 이중 구조
빅테크 투자 확대와 중국의 유휴 인프라 논란, 엇갈리는 신호들
구조적 성장인가, 또 한 번의 사이클인가…AI 반도체의 갈림길
챗GPT로 생성한 AI 이미지입니다.
[오피니언뉴스=박정훈 기자] AI 반도체 시장이 성장 기대와 수급 불안이 동시에 부각되는 국면에 들어섰다. 인공지능 인프라 투자 확대가 메모리 수요를 빠르게 끌어올리며 업황을 반등시키고 있지만, 그 이면에서는 과잉 공급 가능성에 대한 경고도 커지고 있다. 투자 확대와 공급 증가가 맞물리며, 시장은 다시 사이클의 변곡점에 근접하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구조적 성장과 사이클 반복 가능성 사이에서 시장의 방향성에 대한 해석이 엇갈리고 있다.
이번에는 다르다?
현재 시장을 지배하는 것은 전례 없는 수준의 AI 인프라 투자다.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구글, 메타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데이터센터, GPU, 네트워크 장비에 수조 원 규모의 막대한 자본을 투입하며 경쟁적으로 AI 역량 확보에 나서고 있다. 이들의 투자 방식은 수익을 확인한 뒤 확장하는 IT 산업의 전통적 투자 방식과는 다르다. 미래 시장 선점을 위한 '선투자 구조'가 자리 잡으면서 인프라 자체가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 이는 단기적으로 메모리 수요를 폭발적으로 끌어올리는 핵심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AI 시대의 메모리 수요는 과거와 질적으로 다르다. LLM(대규모 언어모델)과 생성형 AI는 연산 능력뿐 아니라 막대한 데이터 처리와 저장을 요구하며, 이는 고대역폭 메모리(HBM) 중심의 수요 급증으로 이어진다. GPU 한 대에 탑재되는 메모리 용량은 기존 대비 크게 증가했고, 단위 시스템당 메모리 소비량 역시 급격히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주요 메모리 제조 기업들의 실적 개선으로 이어지고 있다.
낙관론자들은 이 같은 흐름이 단기적 사이클이 아니라 구조적 변화라고 본다. AI는 검색, 광고, 소프트웨어, 제조 등 산업 전반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으며, 기업과 정부의 도입 역시 가속화되고 있다. 이에 따라 메모리 수요는 경기 민감적 소비가 아니라 디지털 인프라의 필수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공급이 수요를 따라잡지 못하는 상황이 상당 기간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AI 인프라는 단순 IT 수요를 넘어 국가 및 기업 경쟁력과 직결된 투자라는 점에서, 경기 둔화 국면에서도 일정 수준의 수요가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
불안한 기시감
반면 비관론은 보다 냉정하다. 핵심은 투자 지속 가능성이다. AI 인프라 투자 대부분은 소수의 하이퍼스케일러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으며, 이들의 자본 지출은 결국 수익성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만약 AI 서비스의 수익화 속도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 투자 축소는 불가피하다. 이 경우 이미 구축된 인프라는 과잉 상태로 전환되고, 동시에 메모리 업체들의 증설 물량이 시장에 쏟아지면서 공급 과잉이 발생할 수 있다. 이는 과거 메모리 업황 하락과 동일한 메커니즘이다.
반면 일부 전문가들은 2028년을 전후로 AI 인프라 투자가 정점에 도달하고, 이후 메모리 시장 역시 하락 사이클에 진입할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러한 사고의 기반에는 지난 2020년부터 2023년까지 이어졌던 메모리 반도체 업황 침체의 경험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지난 2020~2023년 '메모리의 겨울'로 불렸던 시기의 메모리 반도체 가격 폭락 사례는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코로나19 이후 비대면 수요 급증에 대응해 메모리 업체들은 공격적인 증설에 나섰지만, 2022년 들어 PC와 스마트폰 수요가 급격히 둔화되면서 재고가 빠르게 누적됐다. 글로벌 DRAM의 평균판매가격은 2022년 한 해 동안 40% 이상 하락했고, 낸드플래시 가격 역시 30% 이상 떨어지며 제조 기업들의 수익성은 급격히 악화됐다. 재고 수준은 주요 업체 기준 20주를 넘어서는 수준까지 상승하며 공급 부담이 극대화됐다. 이에 2023년 삼성전자 반도체(DS) 부문은 연간 약 15조 원, SK하이닉스는 연간 약 7조7000억 원의 영업적자를 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2018년 이후 사이클도 유사한 흐름이 있었다. 당시 DRAM 가격은 고점 대비 30% 이상 하락했고, 데이터센터 고객사들의 재고 조정이 장기화되면서 업황 반등이 지연됐다. 서버 수요가 견조할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주요 클라우드 기업들의 투자 속도 조절이 나타나며 시장의 낙관론은 빠르게 꺾였다. 이는 구조적 수요에 대한 기대가 존재하더라도 단기적인 수급 불균형이 시장을 크게 흔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 2월 세계 최초로 양산 출하된 삼성전자 HBM4 제품. 사진 제공= 삼성전자
국가 안보 강화를 이유로 AI 인프라 투자에 역량을 집중해 온 중국에서도 최근에는 AI 인프라 투자 증가율 둔화와 함께 일부 데이터센터의 유휴화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선제적 인프라 구축 이후 수요가 이를 충분히 따라가지 못하는 사례가 나타나면서 투자 규모보다 효율성에 대한 문제가 부각되는 흐름이다. 중국 최대 파운드리 SMIC의 한 경영진은 “수요 없이 구축된 용량이 유휴 상태로 남을 수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는 AI 인프라 역시 과잉 공급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으며, 과거 메모리 사이클과 유사한 신호로 해석될 수 있다는 분석으로 이어지고 있다.
다만 이번 사이클이 과거의 업황 침체 사례와 완전히 같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가장 큰 차이는 수요의 성격과 공급의 진입장벽이다. HBM과 같은 고부가 메모리는 기술 난도가 높아 단기간에 공급을 급격히 늘리기 어렵고, 이는 전통적인 DRAM 시장보다 공급 조절이 제한적이다. 동시에 AI는 선택적 소비가 아니라 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인프라로 인식되고 있어, 일정 수준 이상의 투자는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예상되는 세 가지 시나리오
향후 AI 반도체 시장의 업황을 결정할 변수로는 AI 서비스의 수익화 속도, 빅테크의 자본 지출 지속 여부, HBM 공급 확대 속도, 그리고 레거시 메모리 시장의 회복 등이 꼽히고 있다. 이 변수들의 조합에 따라 2028년 전후 시장은 크게 세 가지 경로로 전개될 수 있다.
첫째는 구조적 성장 지속 시나리오다. AI 수요가 계속 확대되며 공급을 압도하는 상황이 이어질 경우, 메모리 시장은 장기 호황 국면에 진입할 수 있다. 둘째는 소프트 랜딩이다. 투자 증가세는 자연스럽게 둔화되지만 급격한 수요 붕괴 없이 가격이 안정되는 경우다. 셋째는 과잉 공급의 재현이다. 투자 축소와 공급 확대가 동시에 발생할 경우, 과거와 유사한 가격 급락 사이클이 반복될 수 있다.
지금의 AI 반도체 시장은 슈퍼사이클 기대와 과잉 공급 우려가 동시에 작동하는 경계 위에 서 있다. 시장의 향방은 기술 진화와 투자 전략, 그리고 수급 균형이 어떤 속도로 맞물리느냐에 따라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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