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다운뉴스 김한석 기자] 정부가 8개월 만에 '경기 하방위험'을 경고했다. 경기회복 흐름이 5개월째 이어지고 있지만, 중동전쟁 충격파로 물가상승, 민생부담과 더불어 경기 하방위험 증대 우려가 커지고 있다는 진단이다.
중동전쟁 이후 첫 정부 공식경기진단서에서 유가 급등으로 나타난 지정학적 리스크가 국내 실물경제와 물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수출·소비가 다져온 경기 회복경로를 되돌릴 가능성을 경계한 것이다.
이란이 세계 액화천연가스(LNG) 공급량의 20%를 책임지는 에너지 핵심 거점인 카타르 북부 해안의 라스라판 LNG 시설을 보복 공격하자 카타르 측은 19일 시설 복구까지 최장 5년이 필요하다며 한국 등과 체결한 장기 공급 계약을 사실상 취소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사진은 폭격 피해를 입기 전 라스라판 LNG 시설 전경. [사진=AFP/연합뉴스]
12·3 비상계엄 이후 8개월 연속 경기를 짓눌렀던 하방압력이 다시 불거질 우려가 제기된 만큼 '전쟁 추경(추가경정예산)' 추진도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재정경제부는 13일 내놓은 '최근 경제동향(그린북)' 3월호에서 "최근 우리 경제는 소비 등 내수 개선, 반도체 중심 수출 호조 등으로 경기 회복흐름이 이어지는 모습“이리고 진단하면서도 경기 하방위험을 경계했다. 재경부는 ”취약부문 중심 고용애로, 건설투자 회복속도, 미국 관세부과 영향 등 불확실성이 상존하는 가운데 중동상황에 따른 국제유가 상승 등 지정학적 리스크 확대로 물가 상승, 민생 부담 증가 및 경기 하방위험이 증대할 우려가 있다“고 평가했다.
국제유가와 환율 동반 상승 등으로 물가 부담이 가중되면서 경기 하방 리스크가 커질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페트로넷에 따르면 지난달 마지막날 이란·이스라엘의 대이란 공격 이후 격화되는 중동전쟁에 우리나라가 주로 수입하는 두바이유 가격(현물)은 전쟁 직전 배럴당 71.24달러에서 전날 166.80달러로 134.1% 폭등했다. 글로벌 국제유가의 준거인 브렌트유 가격(선물)도 108.65달러로 같은 기간 49.9% 치솟았다. 한국경제의 펀더멘털(기본경쟁력)을 보여주는 원·달러 환율도 유가 상승 영향 등으로 변동성을 키우며 주간거래 종가 기준 전날 1501.0원을 기록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인 2009년 3월 10일(1511.5원) 이후 최고치를 찍으며 전쟁 직전보다 61.3원(4.3%) 급등한 상태다.
정부가 경기 하방 위험·압력을 경고한 것은 지난해 7월 이후 8개월 만이다. 그린북에서 2024년 12월 비상계엄 충격에 ‘하방위험 증가 우려’가 제기된 뒤 지난해 1~7월 ‘경기하방 압력’ 표현이 줄곧 이어지다가 8월 소비 증가세 전환 등으로 경기회복에 긍정적 신호가 나타났다는 진단 아래 자취를 감췄던 경기하방 리스크가 재출현한 것이다.
정부는 경제의 흐름을 지난해 11월부터 ‘소비 등 내수 개선, 반도체 중심 수출 호조’란 표현을 유지하면서 ‘회복국면’으로 진단하고 있는데, 지정학적 리스크가 경기회복을 위협할 돌발 변수로 등장한 셈이다.
수출은 지난달 슈퍼사이클을 맞은 반도체가 전년 동월 대비 사상 최고 증가율(160.8%)로 전체 수출 증가세를 28.7%로 끌어올리는 등 호조세가 이어지고 있다. 상품소비를 보여주는 소매판매는 전년 동월 대비로 지난 1월(0.1%)까지 5개월 연속 증가세를 유지한 가운데 3개월 연속 감소했던 내수용 소비재 출하(2.8%)도 증가 전환했다. 수출과 내수를 아우르는 제조업 생산(7.2%)과 서비스소비를 반영하는 서비스업 생산(4.4%)은 나란히 증가세를 키웠다. 지난해 연간 증가율은 각각 3.0%, 2.0%였다.
중동 지정학적 리스크는 중동전쟁이 에너지전쟁 양상으로 격화되면서 에너지의존도가 큰 한국 경제에 충격을 더한다. 글로벌 원유의 27%, 액화천연가스(LNG)의 22%가 오가는 핵심 '초크 포인트'(병목지점)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얼마나 지속되는 지에 따라 그 충격 수준이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산업연구원은 전날 '미국-이란 충돌과 호르무즈 리스크: 공급망 시나리오 분석과 시사점' 보고서에서 중동발 에너지 가격상승이 국내 산업의 생산비용에 미치는 파급효과를 시나리오별로 추정했다. 해협 봉쇄가 3주 이내로 이뤄지는 경우 유가가 배럴당 105∼125달러 수준으로 오르고, LNG 가격이 60∼90%가량 추가 상승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같은 단기 공급충격만으로도 한국의 전 산업 평균 생산비용은 4.21% 상승하며, 제조업과 서비스업 생산비는 각각 5.4%, 1.4% 오를 것으로 내다봤다. 봉쇄가 3개월 이상 길어지는 최악의 구조적 공급충격 단계에서는 산업 평균 생산비가 9.4% 오르는 것으로 예상됐는데, 제조업(11.8%)이 서비스업(3.1%)보다 여전히 4배가량 커지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처럼 에너지 가격 상승을 통해 지정학적 리스크가 실물경제로 전이되는 가운데 인플레이션(물가상승) 압력도 그린북에 ‘물가 부담’이라는 표현으로 재등장했다. 전년 동월 대비 소비자물가가 4%대(4.7%)를 높게 유지됐던 2023년 2월 이후 36개월 만에 처음이다.
역대 '위기 환율' 추이 [그래픽=연합뉴스]
유가·환율 동반 상승으로 소비자물가의 선행지표인 수입물가를 통해 물가 상방 압력 우려가 커지면서다. 수입물가는 지난달 전월 대비 1.1% 올라 글로벌 금융위기(12개월) 이후 최장 8개월 연속 오름세를 이어갔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주로 환율 상승 영향으로 수입물가가 올랐는데, 전쟁 직전 지정학적 긴장만으로 두바이유 가격이 10.4% 뛰면서 환율·유가 영향이 복합적으로 물가 압력을 키우는 상황이다. 이달 두바이유가 두 배 넘게 폭등한 상태라 조기 종전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올해 들어 1,2월 한국은행의 물가목표 수준인 2.0%를 유지한 소비자물가 안정화 경로가 흔들릴 것으로 보인다.
‘지정학적 리스크’도 그린북 진단에서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사실상 가장 비중있게 부각될 정도로 중동전쟁이 실물경제와 물가가 미치는 충격이 클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이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짐공으로 지정학적 리스크가 확대됐을 때보다 경기 충격에 대한 평가는 심각한 수준이다. 당시 전쟁 발발 다음달에도 유가와 환율이 동반 상승했는데, 그린북 진단은 “침공에 따른 영향으로 공급망 차질, 인플레 우려 등이 심화되면서 원자재·금융시장 변동성이 보다 증가하는 등 불확실성이 지속 확대되고 있다”는 평가에 그쳤다. 그해 5월에야 “우크라이나 사태·공급망 차질 장기화 등으로 투자부진 및 수출회복세 제약이 우려되고 물가상승세가 지속 확대되고 있다”고 경고 수위가 높아졌고, 6월에는 ‘경기 둔화 우려’가 처음으로 제기됐다.
당시 코로나19 팬데믹기 공급망 훼손 후폭풍, 역대급 인플레이션 속에 내수회복이 지체되자 추경이 추진됐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소상공인·자영업자 손실보상 등을 지원하는 역대 최대 규모(52조4000억원)의 추경안은 국회 제출 16일 만인 5월 29일 본회의를 통과한 바 있다.
4년 만에 지정학적 리스크가 한국 경제의 하방 리스크로 엄습한 만큼 정부의 추경 추진도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경기 회복 경로를 거꾸로 돌릴 수 있는 대외요인인 중동 리스크 자체에 대한 대응은 한계가 따르지만 긴급 재정 투입을 통한 ‘추경시계’의 신속 가동으로 그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통령도 전날 청와대에서 주재한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전쟁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 예단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전쟁 추경'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번 추경 역시 민생경제에 대한 충격을 누르고 경기 회복의 동력을 살려갈 방향으로 편성해야 한다. 언제나 속도를 강조하지만, 지금이야말로 속도가 생명"이라고 신속한 추경 추진을 당부했다.
재경부는 “중동상황 영향 최소화를 위해 민생안정·경제회복을 위한 추경을 신속히 편성하고, 관계기관 합동 비상대응반 중심으로 각 부문을 24시간 모니터링하면서 이상징후 발생시 신속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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