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레저
“74년생 이혼남, 90년생 여성 원함” 노모가 대신 쓴 ‘공개 구혼장’
중앙일보
결혼 상대를 찾는 광고지 수천 장이 내걸린 청두 인민공원 중매 시장(成都人民公園 相亲角). 중국 젊은이들이 관심 깊게 구혼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다. 백종현 기자
-74년생. 이혼남. 현직 의사. 두 딸 있음. 80~90년대생 원함, 닭·쥐·뱀띠 선호.
-97년생. 대졸. 가정환경 좋음. 외아들. 청두에 집 있고 차도 있음. 집 한 채 더 살 예정.
-98년생. 미혼남. 키 179㎝. 소프트 엔지니어. INTJ. 월급 1만4000위안(약 317만원). 외아들. 집 2채. 양·뱀·원숭이띠 사양함.
-2000년생. 여자. 키 172㎝. 외동딸. 부모 국영기업서 퇴직. 다들 예쁘다고 함. 집순이. 고양이 키움. 키 180㎝ 이상에 문신 없고, 술·담배 안 하는 남자 원함.
-67년생 여자 키 162㎝, 몸무게 55㎏, 남편 여의고 딸은 결혼해 출가. 청결하고 안정적 수입 있는 사람 원함. 배우자 사별한 사람 우선 고려.
지난 7일 오후 중국 쓰촨성(四川省) 성도 청두(成都)시의 인민공원. 공원 한복판에 A4용지 크기의 광고지가 빼곡하게 걸렸다. 결혼 상대를 찾는 이들이 내건 수천 장의 광고지다. 이른바 ‘청두 인민공원 중매 시장’의 풍경이다.
중국에서는 이런 공개 중매 시장을 ‘샹친쟈오(相親角)’라고 부른다. 청두 시민에게는 익숙한 일상 풍경이고, 여행자에게는 이색 볼거리다.
공원에는 아예 판을 깔고 남녀 궁합을 봐주는 역술가도 있다. 백종현 기자
구혼 광고지를 꼼꼼히 읽어보는 청년, 수첩까지 가져 나와 전화번호를 옮겨 적는 어르신, 번역 앱을 켜고 하나하나 해독해보는 외국인 여행자, 즉석에서 궁합을 봐주는 역술가, 신규 회원을 모집하는 사설 중매업자까지. 35도의 더위에도 중매 시장이 떠들썩했다.
구혼 광고지에는 출생연도, 키, 몸무게, 학력, 직업, 연봉, 부동산 보유 여부, 차종, 연락처까지 거의 모든 신상이 적혀 있었다. 일부는 광고지 한편에 얼굴 인증까지 했다. 1960년대생 중년부터 2000년대 출생의 사회 초년생까지 연령도 다양했다.
구혼 광고를 붙이는 이는 대부분 당사자가 아니라 자녀의 결혼을 걱정해 직접 나선 부모들이다. 한 노인이 광고지에 적힌 연락처를 수첩에 옮겨 적고 있다. 백종현 기자
구혼 광고를 붙이는 이는 대부분 당사자가 아니라 자녀의 결혼을 걱정해 직접 나선 부모들이다. “결혼지참금 필요 없다” “부모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조건이나, 띠 궁합까지 따지는 문구가 자주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20대 청두 시민 저우는 “부모 세대의 바람과 달리 요즘 중국에서는 싱글 라이프를 즐기며 결혼을 미루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청두 ‘후커우(户口·호구)’ 보유 여부를 밝힌 구혼 광고가 많은 것도 흥미로웠다. 후커우는 중국의 주민등록제도로, 한 번 등록하면 지역을 옮기기가 쉽지 않다. ‘도시 후커우’냐 ‘농촌 후커우’냐에 따라 주거·의료·교육의 혜택이 달라 결혼 시장에서 중요한 스펙으로 통한단다.
‘83년생 무주택 미혼남’ 프로필을 가진 기자의 눈도 자연스레 분홍색(여자) 구혼장에 꽂혔다. 백종현 기자
‘83년생 무주택 미혼남’ 프로필을 가진 한국 기자의 절박한 눈빛을 읽었는지, 한 중년 여성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중국어는 모르지만, 얼핏 “좋은 여자 있어요, 이상형이 뭐예요?”라고 묻는 듯했다. 지나던 현지인이 영어로 귀띔했다. “돈을 요구하는 브로커와 사기꾼도 있으니 조심해.”
청두 인민공원 중매 시장은 제법 역사가 길다. 2005년 무렵, 결혼 적령기 자녀를 둔 부모들이 아들·딸의 프로필이 적힌 쪽지를 들고 공원에 나와 일종의 ‘대리 소개팅’을 하던 것이 시작이다. 허위 정보를 앞세우거나 소개비를 요구하는 악덕 중매업자가 생기는 등 부작용도 생겼다. 그러자 2021년 공원에서 아예 전용 공간을 만들고 관리에 나섰다.
이제 구혼장을 걸고 싶은 사람은 공원에 신청서를 내고 신원 확인을 받아야 한다. 양식도 통일됐다. 분홍색은 여성, 파란색은 남성을 가리킨다. 게시 유효 기간은 3개월이다.
청두 인민공원의 중매 시장은 여행자에게도 이색 볼거리로 인기가 높다. 가이드를 대동한 단체 여행객도 흔히 보인다. 백종현 기자
공원에서 만난 한 현지인은 “신분 정보 등록과 서약서 제출이 의무화돼 있다”며 “의외로 매칭 성사율도 높은 편”이라고 말했다.
젊은 세대의 낮은 혼인율과 저출산 문제는 중국에서도 골칫거리다. 중국 정부 자료에 따르면, 중국의 연간 혼인 건수는 2013년 1346만쌍으로 정점을 찍은 뒤 감소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610만6000쌍이 혼인을 신고해 관련 통계 작성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청년 실업률 상승, 주거·양육 비용 부담, 결혼과 출산에 대한 인식 변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해석이다.
청두 인민공원의 구혼장은 그래서 우스꽝스럽기만 한 풍경은 아니다. 집과 차, 직업과 연봉, 후커우와 띠까지 한 장의 종이에 압축된 결혼 시장. 그 안에 중국 청년 세대가 마주한 현실도 함께 걸려 있다.
청두(중국)=글·사진 백종현 기자 baek.jong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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