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재 성치완이 설립하여 운영하였던 ‘원진국민서당’ 기념 사진(1941.10.5.) . 성길모 제공
임철우의 단편 <사평역>은 곽재구의 <사평역에서>를 소설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싸륵싸륵 눈이 내리는 겨울 초저녁, 간이역 대합실 톱밥 난로 주변 풍경, 팔다 남은 굴비며 사과 광주리, 쿨럭이는 기침 소리, 마지막 완행열차를 기다리며 일상에 지친 인물들의 모습들이 묘사된다.
등장하는 인물로는 연체된 여덟 달 치 신문 대금을 걱정하면서도 대합실에 톱밥을 지피며 승객들을 묵묵히 배려하는 늙은 역장, 평생 농사만 짓다 아들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향 땅을 팔고 돌아가는 허 씨, 학생 운동으로 감옥살이를 한 뒤 고향 내려가는 대학생, 교도소에서 갓 출소하여 아직도 삶에 대한 분노와 거친 성정을 지닌 중년 사내, 서울의 어느 음식점에서 얻은 병 때문에 고향으로 낙향하는 길에 연신 콜록거리며 기침을 해대는 병약한 청년, 춘심이라는 야간 업소의 종업원, 사랑에 배신당하고 상처를 입은 서울 아가씨 등이다. 소설이 발표된 시기는 시가 발표된 2년 뒤인 1983년이었다.
1970년 광주에서 태어나 효동초등학교 다니던 어린이 한강(韓江)은 1980년 1월 아버지 한승원을 따라 서울 도봉구 수유동으로 이주하였다. 근처 우이동에 위치한 신경여자중학교(현재 선덕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4살 무렵 임철우의 <사평역>을 읽었던 모양이다. 2023년 4월 28일(금) 영국 일간지 <가디언(The Guardian)>의 문화면 ‘내 삶의 책들(The books of my life)’이란 꼭지에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은 사연을 소개하였다.
"14살 때, 나는 임철우의 단편소설 <사평역>을 읽었다. 눈 내리는 깊은 밤의 시골 간이역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는 주인공이 없고, 막차를 기다리는 승객들의 내면 독백이 마치 메들리처럼 어우러진다. 누군가 기침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말을 붙이려 애쓰며, 누군가는 난로에 톱밥을 던져 넣고 불꽃을 들여다본다." 그리하여 "나는 이 생생한 이야기에 매료되어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The book that changed me as a teenager - At the age of 14, I read ‘Sapyong Station’, a short story by Lim Chul-woo. It depicts a rural train station in the dead of a snowy night, and there’s no protagonist; the inner monologues of passengers waiting for the last train combine like a medley. One coughs while another tries to strike up a conversation, and someone else throws sawdust into the stove and looks into the flames. I was enthralled by this lively story and decided to become a writer.)"
14살, 중학교 3학년 소녀 한강에게 작가의 길을 열어준, 그런 영감을 주었던 작품이 ‘사평역’이었다는 것이다. 임철우는 완도 금일읍에 속하는 평일도라는 섬에서 출생하였다. 곽재구와 같은 시기인 198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개도둑>이 당선되면서 본격 작품을 내었다.
이후 그는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27일까지 10일간 ‘오월 광주’의 밤낮을 시간대별로 추적하며 다큐멘터리로 묘사한 대하소설 『봄날』(문학과지성사, 1998)을 발표하였다. 이는 5·18 민주화운동을 독보적으로 다룬 전사(全史) 형식의 소설로, 그 시절 느닷없는 외환위기로 인한 사회적 동요가 컸지만, 광주·전남지역을 중심으로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한강 작가가 ‘오월 광주’를 다룬 소설 『소년이 온다』(창비, 2014)에 틀림없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지만, 하지만 『봄날』의 문학적 인지도는 그리 오래 유지되지는 못했다.
한강 작가가 기고한 ‘내 삶의 책들’이란 기사를 소개한 영국 일간지 <가디언(The Guardian)>(2023.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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