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영재의 제3의 자본주의
‘2030’ 그들로부터 들어야 할 이야기, 그들에게 해줘야 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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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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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지방선거 결과를 보고 청년들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몇몇 2030청년들을 만나 물었다. 돌아온 답변에는 퇴적된 상처가 진하게 묻어 있었다. 마음을 열고 듣자 그것은 불평이 아니라 시대 진단처럼 들렸다. 더구나 우리 세대는 먼저 퇴장하고 그들은 이 공동체에서 더 오래 살아갈 사람들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예의가 아니라 예비다.
그들은 성장의 내리막에서 자랐다. “해도 안 된다”는 체념은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라는 유행어를 낳았다. 그것은 자조가 아니라 그들의 아픈 고해성사였다. 그들이 가장 분노하는 한복판에는 불공정이 있었다. 특권은 실력으로 둔갑하며, 연줄은 그 어떤 시스템보다 효능감이 크다. 그러니 진보를 자처하는 정치인들이 공정을 말할수록 그들의 냉소는 더 커졌다.
구조적 고용 문제도 제기했다. 통계를 찾아봤다. 한국은행은 2022년 7월부터 2025년 7월까지 청년층 일자리 21만1000개가 줄었고, 그중 20만8000개가 AI 고노출 업종이었다고 분석했다.
반면 50대 일자리는 20만9000개나 늘었다. 통계청 고용동향에서도 청년층 실업률은 7.6%였다. AI 확산과 채용구조 변화 속에서 ‘인턴이 금턴’이 되었다는 푸념까지 나온다. 이런 판에 정부는 AI의 양지만 보고 그 음영에는 무관심하다고 그들은 비판했다.
부동산 문제는 더 직접적이다. 집값은 정책보다 민첩했고, 그럴수록 그들은 외곽의 원룸으로 밀려났다. 긴 출퇴근길은 곧 지친 삶이 되었다.
한편 문재인 정부 이야기를 많이 했다. 남북관계, 탈원전, 젠더 갈등과 같은 이슈들은 이념의 정치, 갈라치기의 정치였다고 말했다. 진위 판단은 차치하고, 그러한 주관적 인식의 토대 위에서 그들의 안티 진보 성향이 강화된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유권자는 모욕과 배신의 감정으로도 투표한다.
그들의 분노에는 교집합이 있었다. 큰 정부에 대한 혐오가 그것이다. 국가가 개입할수록 공정성이 훼손되고, 규제는 늘며, 그 결과 기회의 창이 더 빨리 닫힌다. 선의로 시작한 정책도 관료의 비효율, 정치적 이해관계, 규제 포획, 정보 비대칭 속에서 엉뚱한 결과를 낳는다. 착한 의도가 나쁜 결과를 부르는, 정부 실패의 역설이다. 그래서 그들은 “국가는 빠지고, 시장에 맡기라”고 강변했다.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도 있었다. 그들의 공정성 붕괴 진단에는 동의한다고. 하지만 그 원인을 ‘큰 국가’로만 돌리고, 해법으로 ‘자유시장’을 내세우는 것은 절반의 진실일 뿐이라고. 불공정은 “국가의 문제냐 시장의 문제냐”로만 설명되지 않고 둘의 공범적 합작품이라고. 시장에는 불공정의 약점이, 국가에는 비효율의 허점이 있다고. 한쪽은 기회를 왜곡하고, 다른 한쪽은 자원배분을 왜곡한다고.
따라서 정부의 개입이냐 방임이냐의 이분법이 아니라, 언제 어떻게 개입하고 어디서 물러설 것인가의 설계와 실행이 중요하다고.
예컨대 청년 일자리 문제를 보자. 이 문제는 규제 완화만으로 풀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공공 일자리 확대가 정답도 아니다. 정부는 민간이 청년 고용을 확대할 유인을 정교하게 설계해야 하고, 민간은 그 대가로 교육·훈련·고용의 질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주거도 마찬가지다. 청년의 절망은 시장을 억누른다고, 정부만 앞세운다고 해소되지 않는다. 정부는 무주택 청년의 금융 문턱을 낮추고, 민간이 재개발·재건축과 역세권 공급 등으로 실제 주택물량을 늘리도록 유도해야 한다. 징벌적 규제가 아니라 실수요를 살리고 투기를 거르는 정교한 정책만이 끊어진 주거 사다리를 다시 세울 수 있다.
시장은 활력을 공급하지만, 무너진 사다리를 복구해주지는 못한다. 영화 <기생충>에서 반지하와 언덕 위 저택은 우리 사회에 사다리가 남아 있는지를 묻는다. 애덤 스미스조차 민간이 담당하기 어려우나 사회적으로 필요한 영역은 국가의 몫이라 했고, 밀턴 프리드먼 역시 최소한의 소득 보장에서 국가 개입을 인정했다. 자유시장의 강력한 옹호자들도 사다리 놓는 일만큼은 국가의 역할로 보았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크기가 아니다. 사다리를 놓는 국가인가, 사다리를 걷어차는 국가인가의 문제다. 청년들이 “국가는 빠지라”고 외칠 때, 그것은 국가 자체를 거부하는 말이 아니다. 무능하고 불공정한 국가, 사다리를 걷어차고도 책임지지 않는 국가를 향한 분노다. 정치가 정말 들어야 할 것은 그들 투표 이면에 켜켜이 쌓인 상처다. 청년의 분노를 표심으로만 읽는 국가는 청년도, 미래도 함께 잃는다.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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