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영화법 제정…영화 새 전환점
전문 영화사 지원해 영화 산업화 유도
‘스크린쿼터제’로 국내영화 시장 보호
시대 변화 맞춰 시네마스코프로 전환
신상옥 ‘신필름’ 영화사 기업화 모태
1968년 7월 13일 영화 팔도강산 촬영현장.
박정희 시대는 대한민국영화사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1960년대 대한민국 영화는 양적·질적으로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고, 1970년대에는 이를 뒷받침할 제도적 인프라가 완성됐다. 이 시기에 마련된 기반은 오늘날 K-영화의 세계적 성공을 가능하게 한 토대가 됐다.
◇영화법 제정, 대한민국 영화의 전환점
1962년 1월 20일, 한국 최초로 영화법이 제정되면서 대한민국 영화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동년, 3월 20일 영화법 시행령이 공포되었고, 이로써 영화정책의 법적 근거가 비로소 마련됐다. 영화법 제정의 목적은 대한민국 영화산업의 보호와 육성 발전을 촉진하고, 영화예술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여 민족예술의 진흥에 기여 하는 것이었다.
영화법 이전까지는 영화정책의 근거가 되는 모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영화법은 외국영화의 흥행 수입을 대한민국 영화 제작에 재투자하도록 유도해 제작사의 기업화를 촉진하고자 하는 정책 목적을 갖고 추진됐다. 영화와 관련한 전반적인 사항이 입법화되어 영화 행정의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영화정책의 중요한 발전이었다.
1961년 6월 22일, 정부조직법 제4조의 규정에 따라 공보부가 발족 되면서 문화 행정조직에도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문학, 미술, 음악, 도서, 문화재, 종무행정 등은 문교부에서 관장했고, 영화, 공연, 연예, 정기간행물 업무 등은 공보부가 관장했다. 이와 함께 국립영화제작소설치법이 제정·공포되면서 국립영화제작소가 신설됐다. 이후 1968년 7월 24일 문화공보부로 개편되면서 문화 행정의 일원화가 이루어졌다.
◇1차 개정과 기업화
1963년 3월 12일, 1차 영화법이 개정됐다. 개정의 배경은 1950년대 후반의 급격한 양적 성장으로 제작 기반이 불안정한 영화사들이 난립하면서 영화 한 편만 만들고 도산하는 영화사들이 속출했기 때문이다. 이에 1961년 9월 12일, 문교부는 고시 제148호에 의거 해 새로 제정된 등록 기준에 따라 영화사를 등록하도록 했다.
기준은 1955년 4월 10일부터 1961년 8월 31일까지 제작된 편수를 일정 기준에 따라 사정한 평점이 15편 이상인 영화사에 한 해 등록할 수 있었으며, 기준에 미달하는 영화사는 합동으로 평점을 채우도록 했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영화사들은 자진 통합이라는 형식으로 16개 영화사로 통합됐다.
1차 개정 영화법에서는 영화사의 기업화를 촉진 시키기 위해 일정 조건을 요구했다. 35밀리 촬영기, 조명기, 건평 200평 이상의 스튜디오, 동시녹음 시설, 전속 영화감독, 전속 배우와 기술자를 갖추도록 했다. 이러한 등록 조건의 배경에는 전문 영화사를 육성하기 위한 기업화 정책이 있었다. 기업화 정책은 안정적인 제작 조건과 기반을 갖춘 기업형 영화사들이 중심이 되어 대한민국 영화의 산업화를 주도하도록 했다.
대한민국 영화산업에서 기업화 정책은 영세 제작 자본의 문제를 극복하고, 안정적인 영화 자본을 확립하여 체계적인 기업으로 발전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기업화는 제작시스템을 합리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흥행 가능성이 높은 장르 영화의 제작으로 이어졌다. 1960년대의 대작 영화와 시네마스코프 영화 제작, 장르의 다양한 분화가 가능했던 것은 기업화 정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의무 상영제와 스크린쿼터
1966년 8월 3일, 2차 영화법이 개정되면서 대한민국 영화 의무 상영제가 명문화됐다. 실제 시행은 1967년 1월 1일부터 이루어졌다. 관행적으로 스크린쿼터제라 불리는 대한민국 영화 의무 상영제는 대한민국 영화산업을 보호해 온 대표적인 제도적 지원 정책이었다.
대한민국 영화 의무상영제의 목적은 외국영화의 국내 영화시장 잠식을 방지하고, 대한민국 영화의 기업화와 활성화를 법적·제도적으로 유도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일정한 기준에 따라 의무적으로 대한민국 영화를 상영하도록 했다. 1967년 1월 1일, 영화관에 대해 연간 90일 대한민국 영화의 상영을 의무화했다. 이후 몇 차례 상영 제한의 축소와 확대를 반복하다가 1985년에 연간 146일로 정해졌다.
◇신필름과 시네마 왕국의 등장
1950년대 초에 설립된 신필름은 대한민국 영화 기업화의 모태로 평가받았다. 신상옥 감독은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를 롤모델로 신필름을 만들었다. 시네마 왕국이었던 신필름은 영화의 산업적 가치를 이해한 신상옥 감독의 산물이었다.
신필름은 1950년대 후반부터 영화 제작에 필요한 인력을 자체 조달하기 위해 신필름 소유의 스튜디오를 건설했다. 서울 용산에 있었던 원효로 스튜디오는 1,000평 규모의 촬영 스튜디오와 녹음실, 편집실, 영사실, 부설 연기자 양성소 등이 구비 되어 있어 제작과 후반 작업까지 할 수 있었다. 여기에 전속 배우와 200여 명의 전속직원을 채용해 안정적인 제작 인력을 갖추며 기업화를 준비했다.
신필름은 1960년대 대한민국 영화 르네상스 시대를 이끌었다. 명보극장과 배급 체인을 형성하여 자사 작품을 영화관에 안정적으로 공급했다. 1961년 1월 28일, 명보극장에서 개봉한 신상옥의 ‘성춘향’은 74일 동안의 장기 상영으로 동원 관객 수 38만 명이라는 당시 국내외 영화를 통틀어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웠다. 이 영화는 제22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 출품됐고, 1962년에는 일본 대영계극장과 계약해 로열티 5,000달러에 수출되면서 일본 6대 도시에서 개봉됐다.
1966년, 신필름은 안양촬영소를 인수했다. 이와 함께 전국 주요 도시에 지사를 설치해 직접 배급을 시도했다. 이후 다수의 흥행 성공작과 영화제 수상이 잇따르면서 홍콩을 비롯한 해외 합작영화 프로젝트도 추진했다. 신필름에서 제작한 사극 ‘폭군 연산’, ‘이조 여인 잔혹사’, 문예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벙어리 삼룡이’, 코미디 ‘로맨스그레이’, 액션영화 ‘빨간 마후라’ 등은 장르 영화를 통해 1960~1970년대 활동했던 스타 배우들을 배출했다.
1961년 상영된 춘향전 영화포스터 (감독 홍성기, 주연 김지미, 신귀식)
‘춘향전’-‘성춘향’ 경쟁 영화계 큰 화제
‘미워도 다시한번’ 38만명 7년간 신기록
‘맨발의 청춘’ 신성일·엄앵란 스타 부상
‘빨간 마후라’ 기체에 카메라 달고 촬영
개봉 시기·관객 분석해 장르 영화 배치
◇화면 비율의 변화와 컬러 시대
1960년대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화면 비율의 변화였다. 1950년대 미국의 가정에서 텔레비전이 인기를 끌면서 미국영화계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와이드 스크린을 일반화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영화도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어 이전 스탠더드 화면 비율에서 시네마스코프로 전환했다.
1961년 1월, 최초의 컬러 시네마스코프 영화인 홍성기의 ‘춘향전’과 신상옥의 ‘성춘향’이 동시 개봉되면서 화려한 컬러 시네마스코프의 시대를 예고했다. 두 영화는 총천연색 영화의 아름다움과 그 위력을 관객에게 충분히 전달했다. 1962년에는 신상옥의 ‘폭군 연산’, 김승옥의 ‘이차돈’, 이용민의 ‘맹진사댁 경사’ 등 100여 편이 시네마스코프로 제작됐으며, 컬러 시네마스코프도 13편이나 제작됐다.
1967년에는 강대진의 ‘청춘극장’ 등 61편이 컬러 시네마스코프로 제작됐고, 1969년에는 총 제작 편수 229편 가운데 7편을 제외한 222편이 컬러 시네마스코프 영화로 제작됐다. 스탠더드 화면에서 시네마스코프로의 전환은 1960년대 초반 대한민국 영화산업의 기업화에 기인한 것이었다.
‘춘향전’과 ‘성춘향’의 경쟁은 한국영화계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1961년 1월 18일, 서울 국도·국제극장에서 ‘춘향전’(김지미 주연)이 개봉됐고, 10일 후 명보극장에서는 ‘성춘향’(최은희 주연)이 개봉되면서 열띤 경쟁을 벌였다. 현대적 감각의 소유자인 20대 젊은 춘향 김지미와 고전적인 여성미를 상징하는 30대 춘향 최은희의 맞대결은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결과는 신상옥·최은희 커플의 ‘성춘향’이 흥행에 대성공하면서 홍성기·김지미 커플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겨줬다. 당시 기사에 의하면 ‘춘향전’의 평면적인 색조에 비해 코닥 필름으로 촬영하고 일본 동양현상소에서 프린트를 제작한 ‘성춘향’의 컬러가 더욱 현란하고 화려하면서도 고전적이고 본격화된 컬러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영화는 38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1968년 정소영의 ‘미워도 다시 한번’ 이전까지 약 7년이 넘는 기간 동안 흥행 신기록을 유지했다.
◇대작 사극의 시대
대한민국 영화 기업화의 성장은 산업화의 진전으로 이어졌다. 대중들의 높아진 영화 소비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영화사들은 시대적 흐름에 적응하는 변화가 필요했다. 대작 사극 영화들은 이런 변화의 요구에 적합한 장르였다. ‘성춘향’이 보여준 화려한 세트와 의상의 스펙터클은 당시 대중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영화사 입장에서 대작 영화는 한 해의 흥행을 좌우하고 존폐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당연히 흥행 성수기에 집중하는 경향은 더욱 가속화됐다. 이에 컬러 시네마스코프로 무장한 초기 한국형 블록버스터 대작 사극 영화들이 설날이나 추석 개봉을 목표로 제작됐다.
1962년 ‘연산군’은 신정에 개봉해 흥행 베스트 작품이 됐다. 국도극장에서 개봉한 유현목의 ‘임꺽정’은 장기 상영 대한민국 영화 2위를 기록했다. 제작비 1억 환을 투입한 ‘에밀레종’은 추석 시즌 국도극장에서 개봉해 동원 관객 수 10만 명을 기록했다. 권영순의 ‘진시황제와 만리장성’은 국도극장에서 개봉해 동원 관객 수 9만 명을 기록했다. 이 영화는 경기도 시흥에 10미터 높이의 오픈세트를 세웠는데, 이 세트를 세우는 데 1,600명의 인원이 동원됐다. 총제작비 2천 8백만 원, 촬영 기간 6개월, 동원된 인원만 12만 명이었다.
이처럼 대한민국 영화의 기술적 발전과 제작비 상승은 대작 영화의 생산을 가능하게 했다. 이 시기 초기에 대한민국형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제작됐다는 것은 산업화가 진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였다.
◇장르 영화의 다양화와 질적 향상
1960년대는 장르 영화가 본격적으로 분화되고 발전한 시기였다. 제작사별로 주력 장르가 생겨나고, 흥행을 고려하여 개봉 시기와 관객에 대한 분석을 통해 장르 영화를 배치했다. 이 기간에는 한 작품이 흥행 성공하면 이어 유사한 경향의 작품이 군집을 형성하는 전형적인 장르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960년부터 1963년까지 가족을 통해 새로운 사회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었던 가족 드라마가 전성기를 누렸다. 신상옥의 ‘로맨스빠빠’, 강대진의 ‘박서방’, ‘마부’, 이형표의 ‘서울의 지붕 밑’, 이봉래의 ‘삼등과장’, ‘월급쟁이’ 등과 같은 가족 드라마가 성행했다.
1960년 10월 5일 개봉한 ‘박서방’은 국제극장에서 동원 관객 수 10만 명을 기록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가족 멜로드라마로 근대의 초입에서 서민층이 겪어야 했던 가치관의 갈등을 주인공 박서방과 그 자식들의 대립을 통해 잘 드러내고 있다. ‘마부’는 국제극장에서 개봉해 동원 관객 수 15만 명을 기록했고, 국내 최초로 제11회 베를린영화제에서 은곰상을 받았다.
1964년 상영된 빨간마후라 영화포스터 (감독 신상옥)
◇신파 멜로의 정점
1968년 7월 16일에는 1960년대 최대 흥행작인 정소영의 ‘미워도 다시 한 번’이 국도극장에서 개봉해 64일의 장기 상영으로 동원 관객 수 38만 명을 기록했다. 이 영화는 대한민국 신파 멜로의 원형과도 같은 작품으로 본처와 첩 간의 갈등이라는 당대의 사회적 이슈를 심도 있게 그렸다. 대만과 일본에도 수출되어 인기를 끌었다.
1960년대 중반에 유행한 청춘 영화는 젊은 관객층을 확보했다. 청춘 영화의 붐과 함께 김기덕의 ‘맨발의 청춘’에 등장한 신성일과 엄앵란 커플은 스타로 급부상했다. 1964년 2월 29일 개봉한 ‘맨발의 청춘’은 아카데미극장에서 동원 관객 수 10만 명을 기록했다. 이 영화는 신분의 벽을 뛰어넘은 젊은이들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담아내 청춘 영화의 전범이 됐다.
1960년대 새로운 장르의 감각과 미학은 액션 스릴러 장르를 통해 생산됐다. 김기덕 감독의 데뷔작 ‘5인의 해병’, 김묵의 ‘현상 붙은 사나이’, ‘급행열차를 타라’, 이만희의 ‘다이알 112를 돌려라’, ‘돌아오지 않은 해병’, ‘마의 계단’, 신상옥의 ‘빨간 마후라’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었다.
‘빨간 마후라’는 명보극장에서 개봉해 동원 관객 수 25만 명을 기록했다. 신상옥 감독이 촬영 기재의 부족으로 고민하다 카메라를 비행기 동체에 부착시켜 촬영한 것이 크게 성공했다. 공중전 장면을 촬영한 최초의 대한민국 영화로 전투기 조종석 자리에서 공중 장면을 촬영해 전투기의 움직임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등 전투기들의 고공비행을 매우 역동적으로 담아냈다.
글=박정희아카데미 부속 박정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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