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각순 화백의 살수대첩, 1975년.
◇ 박정희와 김종필의 사업구상
박정희는 민족문화 이념을 구호로 내세우며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부터 문화재 보호법을 제정하고, 각종 문화예술단체의 통폐합을 단행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1962년에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를 출범시켜 해방 후부터 끊임없이 반목과 분쟁을 일삼았던 문화단체들 내부의 갈등들 역시 해소했다.
국가가 개입하여 예술단체를 통제한다는 시선도 있었으나 소모적인 파벌로 인한 폐해를 해결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루었고 문화예술에 대한 국가적 지원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다방면으로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지방의 작은 시군면에까지 공평하게 골고루 그 혜택이 가도록 노력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국제교류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한국 미술계의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박정희는 근대화 문제를 자유주의나 서구주의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민족주의의 문제로 이해했다. 그가 민족기록화 사업을 구상했던 분야도 국난극복 이라는 바탕에 국가를 발전시키자는 의식이 있던 것이다. 1963년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표출된 박정희의 민족주의는 사대주의 근성 타파, 민족의 ‘주체의식’등 정신적 측면을 강조하고, 한국 사회의 문화와 체질의 특수성을 강조하면서, 그 초점은 경제개발, 산업화에만 중점을 둔 것이 아닌 민족문제의 본질을 설파하고 싶었던 것이다.
민족기록화 사업은 이러한 민족문화사업의 일환으로 1967년에 55점, 1973년에 경제편 30점, 1975년 전승편ㆍ경제편(2차) 40점, 1976년 구국위업편 20점, 1976년 문화편 14점이 제작되었다.
처음 이 사업은 김종필이 영국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성 그레이트 홀 에 걸린 찰스 이워트(Charles Ewart, 1769~1846)의 영웅적인 모습을 그린 그림을 본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정서는 당시 민족주의를 강조할 필요가 있는 대한민국의 정서와 맞아 떨어졌고 귀국 후 본격적으로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한다.
구체적 사업 실행에 김종필·김세중·정창섭이 1966년 12월 초에 민족기록화 제작위원회를 발족시키고 협의를 시작한 시점부터 시작되었다. 같은 해 8월에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를 발족시켜 위원장을 맡고 있었던 김종필은 충무공 동상을 제작 중이었던 김세중을 참여시켰다. 이때 전체적인 구상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공식적으로는 1967년 3월에 기록화제작사무소(대표 이원엽)가 설치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도 격려사에서 애국선열들의 거룩한 발자취를 민족기록화를 통해 온 겨레가 한마음 한뜻으로 단합하여 민주역량을 증진시키고 승공통일(勝共統一)을 다짐할 것을 당부했다. 이 사업을 기획하고 주관했던 김종필 역시 전시도록에서 ‘민족중흥의 숭고한 정신적인 전기를 마련하게 되는 보람찬 민족적 문화운동’이고, 국민이 소장하고 있는 귀중한 미술품을 진열할 수 있는 현대식 기념관을 건립할 것을 밝혔다.
◇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작품들
1972년 이후부터는 더 적극적으로 사업을 펼쳤다. “국난 극복의 사례를 미술 작품화하여 민족의 긍지를 함양”한다는 목표로 1973년부터 ‘기록화 5개년 계획’이 세워졌고, 이 시기의 민족기록화 사업은 재정적 후원과 작품의 내용면에서 이전의 사업과 작품들보다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문화공보부의 민족기록화 제작 추진 방침 역시 작성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문공부에서 국사편찬위원회에 위촉해 소재를 뽑아 추진위원회의 자문을 거쳐 회화화 할 수 있는 소재를 선정한다.
2. 소재에 따라 작가를 정하고 제작을 위촉한다· 작가와 고증 위원의 연석회의를 통해 작가의 능력과 적성을 검토, 협의한 후 결장하는 데, 이때 문공부에 의해 제작 기간과 제작비가 작가에게 통보된다.
3. 고증위원은 통상 사학자, 문화재연구소장 등으로 구성되고, 작품을 분담 고증하게 된다.
4. 작품초고를 고증위원의 자문에 따라 작성하고 전체 고증 위원회에서 2~3차 검토해서 보완한다.
5. 제작추진위원회의 자문을 받아 초고를 최종 검토하고 본화(本畵)를 제작 완성한다.
이 방침을 살펴보면 정부가 고증의 필요성도 놓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근현대사를 소재로 주로 사진에 의존했던 이전의 민족기록화와 달리 이 시기에 제작된 민족기록화들은 고대사, 중세사를 소재로 했기 때문에 작가 자신의 자질만으로는 해결하기 힘들었다. 이에 따라 역사학자들이 작가들에게 자료를 제공하거나 의견을 전달했다. 당시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최영희, 서울대 교수였던 김철준 등이 고증위원으로 활동했다.
1975년 8월에는 《제2차 경제편》, 《전승(戰勝)편》이 국립현대미술관 에서 전시되었다. 《경제편》에는 이마동, 이용환, 천칠봉, 박항섭, 문학 진, 최영림, 양인옥, 오승윤, 정영렬, 박영선, 박창돈, 손응성, 정창섭, 김원 등이 참여했다. 《전승편》에는 이종상 <광개토대왕의 영토확장>, 박각순 <살수대첩>, 박창돈 <안시성 싸움>, 오승우<신라의 당군격퇴와 삼국통일> <행주대첩>, 박광진 <장보고의 해상활동>, 이용환 <귀주대첩>, 안재후 <여진 정벌>, 김태 <동령부 오라산성의 공함> <육진개척>, 김서보 <삼별초의 대몽 항전>, 문학진 <쌍성수복>, 김형구 <한산대첩>, 박석호 <추풍령 싸움>, 김기 창 <명량대첩>, 박항섭 <연안성 싸움>, 강대운 <진주성 싸움>, 장리석 <홍주성 수복>, 정창섭 <태백산 전투>, 손수광 <청산리 싸움>이 전시되었다.
1976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구국위업(救國偉業)편》이 개최된다. 이종상 <태종무열왕>, 오승우 <계백장군의 황산싸움>, 정영렬 <연개소문의 살수싸움>, 이인영 <안융진과 담판을 하는 서희>, 박창돈 <최영장군의 홍산전투>, 정창섭 <조헌의 금산 전투>. 김태 <홍의장군 곽재우>, 박서보 <설법으로 왜장을 감동시킨 사명당>, 박광진 <승군을 지휘하는 휴정>, 신영상 <백마산성을 지킨 임경업 장군>, 오승윤 <동학교주 전봉준>, 손수광 <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 이의주 <최익현 선생의 유해환국>, 박기태 <박승환의 자결순국>, 박각순 <교정에선 이승훈 선생>, 박영선 <이등박문을 총살하는 안중근 의사>, 장리석 <민족을 계몽하고 있는 안창호 선생>, 최대섭 <민족대표의 독립선언>, 문학진 <파고다 공원의 3.1 독립만세 시위>, 임직순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가 전시되었다.
우리가 역사교과서나 책에서 한 번쯤 봤을 그림들이 모두 이 시기 제작되었고, 이것은 오늘날도 교육적 차원과 예술사적 의미로도 성공한 민족문화 사업으로 평가된다. 1960년 4.19혁명 이후 미술계에서는 민족정체성에 관한 관심이 점차 확대되고 있었지만, 주로 색이나 표현기법 같은 외면적인 것에 치우쳐 그 층이 너무 얇았고 고증 역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정희는 작가들에 대한 물질적 지원과 교육 차원의 국가적 사업을 통해 작가들에게도 국가사업에 참여한다는 사명감과 자신들의 작품 경력에도 의미가 있는 사업으로 평가받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7년 9월 7일 경북도 경주에 있는 통일전(統一殿) 삼국통일 기록화 자료실을 둘러보고 있다.
사업주체들 모두 ‘대중 교육’ 사명감
“조상의 위업·얼 깃든 역사의 산 기록”
민족적 주체성·호국 의식 고취 등 기여
초등교사 출신 朴, 민족 교육 사업 실행
◇ 교육사업으로써 기념비적 업적
민족기록화는 역사로써 대중을 교육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당시의 사업주체들 모두 사명감을 가지고 참여하였다. 이는 1978년 한국도서출판공사에 의해 ‘민족기록화(Documentary pictures of Koreanpeople) 구국위업편(Great Accomplishments to Save Nation)’ 이라는 화집이 출판되었던 것을 통해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최영복은 이 화집의 서문에서 이어 구국위업편은 “국민에게 우리 역사를 눈으로 보고 느끼며, 이해시키기 위한 큰 사명”을 가지고 제작되었고, “이 기록화는 단지 미술품으로서만이 아니라 우리 조상의 위업과 얼이 깃든 역사의 산 기록”으로 보존되어 학교 역사교육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자신감을 가지고 설명하였다.
박정희 시대에는 전통을 되찾자는 구호 아래 다른 미술 활동을 하던 화가들 또한 국가적으로 추진되었던 민족기록화 사업에 참여하였다. 이 결과 민족기록화에는 한 가지의 미술 양식으로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양상의 그림들이 나타났고, 이러한 국가사업에 참여한 미술가들의 다양한 작업 절차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 당시 제작된 기록화들은 조상의 자주정신과 민족적 슬기, 그리고 근대화의 성과를 후손에게 전승하여 민족적 긍지를 높이려는 목적에서 기획되었다.
작품들은 구국의 위업, 경제 발전상, 건설 현장 등 크게는 역사와 산업, 전쟁의 세 가지 범주로 나뉘며, 근대화 시기 국가의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확립하고자 했던 시대적 배경을 담고 있으므로 이 사업이 가져온 긍정적인 부분은 무수히 많으며 이러한 사업들이 가져온 긍정적인 측면들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첫째, 민족적 긍지와 호국정신 함양을 들 수 있다. 외세의 침략을 극복한 역사적 위업과 충무공 이순신, 을지문덕 등 국난 극복의 상징적 인물들을 대형 회화로 제작하므로 이를 통해 국민들에게 민족적 주체성과 호국 의식을 고취하는 데 기여 했다는 평가와 선진국과 경쟁해야 하는 개발도상국인 대한민국의 군중심리에 적지 않은 긍정적 결과를 가져왔음은 물론이다.
둘째, 시각 자료를 통한 역사의 대중화이다. 글이나 문헌으로만 접했을 역사적 장면들 예를 들어 거북선 출정, 살수대첩 등의 전장터를 사실적이고 웅장한 회화로 재현하여 대중이 한국사를 쉽게 이해하고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림의 주는 시각적 효과는 글과 영상 보다 더 많은 잔상을 대중의 머릿속에 남긴다.
셋째, 예술인과 미술인 지원 및 기록화 장르를 개척한 것이다. 당시 전위적인 추상화가들을 포함한 당대 최고의 화가들에게 국가적인 지원을 제공하며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은 작가들의 생계 및 창작 활동을 뒷받침함과 동시에 한국 미술계에 ‘역사 기록화’라는 중요한 장르를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 교사 출신 박정희가 본 민족교육
박정희 라는 인물을 생각하며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것들은 군인 출신의 혁명가가 만들어 낸 대한민국의 성취다. 대한민국 자체가 그의 박물관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만큼 다양한 분야의 성공은 그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한 국가를 성장시켰는지 한 눈에 확인이 가능하다. 경제발전과 자주국방, 그리고 민족문화 사업과 근대적 교육등 최근에는 더 다양한 분야에서 박정희의 의지가 담겨있는 근대국가의 열망이 어떻게 표출되었는지를 우리가 확인 할 수 있다. 어느날 필자의 머리에 떠오른 한가지 생각이 있었다. 박정희가 그토록 다양한 분야에 자신의 의지를 반영하고 필요했던 것들을 성공시키는 과정들은 여느 타국의 국가 지도자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 시기 손을 댄 많은 사업들은 그 당시 대한민국에 절실히 필요한 것들이었으며 공통점을 살펴보면 박정희의 개인적 의지 역시도 강하게 들어간 것들이 많다. 이것은 단순하게 “권력자이니 누구든 따르지 않았겠나...”라는 단편적인 평가를 넘어서 교육자가 가질 수 있는 특유의 섬세함으로 평가해 볼 수 있다.
박정희는 혁명가 이전에 군인이었고, 군인이기 이전에 교사 즉 교육자였다. 잘 알다시피 초등교육은 교사 한 명이 수학, 국어, 외국어, 윤리등 다양한 분야의 많은 것들을 책임진다. 해당 교사에게 주어진 학생 수 만큼이나 다양한 주제를 책임져야 한다.
박정희는 한 국가가 경제발전에 매진 하면서도 즉시 전쟁 가능한 국가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교육헌장과 문화재 재건 사업 등을 통해서 민족교육의 중요성 역시 놓치지 않았던 인물이다. 이 모든 게 그가 교사 출신의 정체성으로 혁명 과업들을 수행했다는 필터링으로 박정희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간다. 같은 민족문화 사업에도 한 차원 더 깊게 교육사업을 실행했는데 그것이 바로 ‘민족기록화 사업’이었던 것이다.
글=박정희아카데미 부속 박정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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