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동현 변호사(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줄만 알았던 반도체산업이 사람의 생명을 꺼뜨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19년 전 고 황유미씨를 통해 알려졌다. 그 이후 지금, 반도체산업을 묻는 연속 기고를 싣는다. <편집자>
지난달 6일은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고 황유미 노동자의 19주기였다. 이날은 반도체 전자산업 산재사망 노동자를 함께 추모하는 날이기도 하다.
1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분명 변화도 있었다. 산업재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높아졌고 일부 제도도 개선됐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무겁다. 직업성 암과 희귀질환에 대한 피해 제보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죽음 역시 멈추지 않았다.
위험의 모습도 달라지고 있다. 위험은 더 낮은 곳, 더 작은 사업장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더 취약한 노동자들에게 집중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우연이 아니다. 반도체와 전자산업의 생산 구조가 복잡한 공급망 형태로 재편되면서 위험 역시 그 구조를 따라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핵심 공정에서 발생하는 유해물질 노출과 위험한 작업은 점점 더 하청과 재하청으로 외주화되고 있다. 나아가 해외 사업장으로 이전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위험을 떠안는 이들은 공급망의 가장 아래에 위치한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비정규직이거나 영세 사업장 노동자이며 이주노동자인 경우도 많다.
문제는 이들이 처한 구조적 조건이다.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어렵고 교섭을 요구하기도 어렵다. 무엇보다 자신의 근로조건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는, 공급망 최상위에 위치한 원청기업(공급망주도기업)을 상대로 문제를 제기할 통로가 거의 없다.
다시 말해 위험은 아래로 내려가지만 책임은 그에 맞게 내려오지 않는다. 오히려 책임은 잘게 쪼개지고 흐려진다. 그 결과 사고와 질병이 발생해도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조차 불분명해진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만약 공급망 책임법이 있었다면 황유미 노동자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 단정적으로 답하기는 어렵다. 직업성 암은 인과관계 입증 자체가 쉽지 않은 질병이다. 하나의 법이 특정한 죽음을 막을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 또한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적어도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공급망 책임법은 제2, 제3의 황유미를 막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될 수 있다. 공급망 책임법은 기업이 자신의 사업장뿐 아니라 공급망 전반에서 발생하는 인권과 환경 위험을 관리하고 예방하도록 요구한다. 위험을 인지하고 개선 조치를 취할 의무를 부과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책임을 묻는 구조를 마련한다.
이 법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기업에 의무를 부과하기 때문이 아니다. 공급망 하단의 노동자들에게 최소한의 통로를 열어준다는 점에 있다. 노동자는 원청기업에 협의를 요청할 수 있고 원청의 실질적 관여가 인정되는 경우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또한 입증책임을 완화하는 장치를 통해 정보에 접근하기 어려운 노동자들도 문제 제기를 시도할 수 있게 된다.
강조하지만 공급망 책임법은 완전한 해결책이 아니다. 모든 위험을 제거할 수도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최소한의 기반을 마련해 줄 수는 있다. 이미 유럽에서는 기업의 인권 및 환경 실사 의무를 공급망 전반으로 확대하려는 입법이 진행되고 있다.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다. 규제의 후퇴 논의도 있다. 그럼에도 기업의 책임을 공급망 전체로 확장해야 한다는 방향 자체는 분명하게 자리 잡고 있다. 한국 기업들 역시 외국에서는 이러한 기준에 맞추어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법적 의무가 없다는 이유로 공급망 노동자의 문제를 외면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반도체와 전자산업은 국가의 전략산업이다. 대규모 지원과 규제 완화가 논의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산업이 감당해야 할 책임에 대해서도 함께 논의해야 한다. 위험을 외주화한 채 이윤만을 집중시키는 구조를 그대로 둔다면 또 다른 황유미는 계속해서 발생할 수밖에 없다. 공급망 책임법은 그 구조에 균열을 내기 위한 시도다. 가장 낮은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위험을 말하고 그 위험을 줄이기 위한 변화를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 최소한의 장치다.
우리는 제2의 황유미를 완전히 막을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위험을 줄이고 피해가 발생했을 때 기댈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만드는 것은 가능하다. 지금 공급망 책임법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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