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반도체 수요 폭발이 촉발한 ‘칩플레이션(Chipflation·반도체와 인플레이션의 합성어)’이 일시적 수급 불안을 넘어 글로벌 정보기술(IT) 산업의 구조적 고질병으로 자리잡고 있다. 반도체 공급망이 AI 중심으로 급속히 재편되면서 범용 메모리 수급이 직격탄을 맞았고, 이는 곧 PC·노트북·스마트폰 등 소비자 완제품의 연쇄적인 가격 폭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22일 닛케이아시아 등 주요 외신과 관련 업계에 따르면, 글로벌 메모리 제조사들의 공격적인 설비 투자에도 불구, 내년 말까지 시장의 D램 수요 대비 공급 충족률은 약 60% 수준에 머물 것으로 전망된다.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 현상이 향후 수년간 고착화된다는 의미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메모리반도체 빅3가 일제히 생산라인 증설을 서두르고 있으나, 반도체 미세공정의 특성상 신규 라인이 안정적인 양산체제에 진입하기까지는 물리적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앞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 3월 엔비디아 연례개발자회의(GTC)에서 “반도체 웨이퍼 부족 현상이 2030년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칩플레이션 장기화의 근본적 배경에는 반도체 시장의 ‘AI 쏠림 현상’이 자리하고 있다. 글로벌 빅테크를 중심으로 AI 서버 구축 경쟁이 불붙으면서 고대역폭메모리(HBM)와 같은 고부가가치 제품에 수요가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가고 있다. 수익성 극대화에 나선 주요 제조사들이 고성능 AI 메모리 생산에 역량을 집중하면서, 상대적으로 수익이 낮은 소비자용 범용 D램과 낸드플래시 생산은 뒷전으로 밀리는 구조적 괴리가 발생한 것이다.
시장은 수급 균형을 위해 향후 2년간 D램 생산량이 연평균 12% 이상 늘어야 한다고 분석하지만, 실제 공급 증가율은 7%대에 그칠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같은 공급 절벽은 곧장 거센 가격 인상 압력으로 분출됐다. 올해 1분기 D램과 낸드플래시 가격은 각각 50%, 90% 이상 폭등했고 2분기에도 최고 90% 안팎의 추가 상승이 기정사실화된 상태다.
메모리 원가 폭등의 청구서는 결국 완제품 가격 인상이라는 형태로 소비자에게 고스란히 전가되고 있다.
가전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최신형 노트북 가격은 전작 대비 무섭게 치솟았다. LG전자의 ‘그램’ 시리즈는 1년 사이 100만 원 가까이 가격이 뛰었고, 삼성전자 ‘갤럭시 북’ 시리즈 역시 모델별로 수십만 원에서 최대 90만 원까지 인상됐다.
스마트폰 시장도 예외는 아니다. 삼성전자의 차기작 ‘갤럭시S26’ 시리즈의 출고가는 전작 대비 최대 29만5900원 상승하며, 최고사양 모델은 250만 원의 벽을 넘어섰다. 폴더블폰 등 플래그십 모델 전반에 걸쳐 도미노 인상이 이뤄지고 있다. 콘솔 게임기인 소니 플레이스테이션5(PS5)가 100달러가량 인상된 것을 비롯해, 에이수스·HP·델 등 글로벌 PC 제조사들 역시 일제히 가격 인상 대열에 합류했다.
업계 일각에서는 연말까지 PC 완제품 가격이 20% 이상 추가 상승할 수 있다는 비관적 전망마저 나온다. 한 산업 전문가는 “AI가 촉발한 반도체 공급망의 근본적 구조 개편이 단기간에 해소될 가능성은 희박하다”며 “칩플레이션이 가전과 IT기기 전반의 고물가를 고착화하는 뉴노멀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진단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