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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불가피한 선택이었나…타임라인으로 본 미국의 계산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기 12일 전인 1945년 7월 25일. 미군은 ‘8월 3일 이후 날씨가 허락하는 대로’ 첫 번째 원폭을 사용하라는 작전명령을 내렸다. 준비되는 추가 원폭도 이어서 투하하도록 했다.

1945년 8월 9일 미군 B-29 폭격기가 일본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뒤 짙은 연기 기둥이 18㎞ 이상 치솟은 모습.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기 12일 전인 1945년 7월 25일. 미군은 ‘8월 3일 이후 날씨가 허락하는 대로’ 첫 번째 원폭을 사용하라는 작전명령을 내렸다. 준비되는 추가 원폭도 이어서 투하하도록 했다.

일본에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기 하루 전이었다. 원폭 사용을 위한 군사적 준비는 일본의 답변을 확인하기 전 사실상 마무리된 상태였다.

해리 트루먼 당시 미국 대통령은 두 번째 원폭이 나가사키에 투하된 8월 9일 대국민 연설에서 “전쟁의 고통을 줄이고 수천 명에 이르는 젊은 미국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사용했다”고 말했다. 일본 본토를 침공할 경우 발생할 미군의 막대한 희생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설명이다.

두 차례 원폭 투하로 1945년 말까지 숨진 사람은 히로시마 약 14만명, 나가사키 약 7만4000명 등 모두 21만4000명으로 추산된다. 당시 두 지역에 있던 조선인 약 7만명이 피폭됐고 그 가운데 약 4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원폭 투하 당시 나가사키에는 조선인, 중국인, 연합군 포로, 화교, 유학생, 성직자 등 많은 외국인이 거주하고 있었고 이들 역시 그 피해를 피할 수 없었다. 이들 외국인 상당수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과 침략 전쟁의 결과로 나가사키에서의 생활을 강요받은 사람들이었다.”

나가사키종합과학대학 평화문화연구소가 1995년 7월 피폭 50주년에 맞춰 펴낸 원폭 관련 기록 ‘신판 나가사키 1945년 8월 9일’에 서술한 구절이다.

1945년 8월 6일 원자폭탄이 투하된 뒤 폐허로 변한 일본 히로시마 시가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히로시마에 포로로 억류돼 있던 미군도 원폭으로 숨졌다. 미국 정부는 자국 내 비판을 우려해 이 사실을 오랫동안 비밀에 붙였다. 처음 인정한 건 1983년이다. 지난 3월 숨진 피폭자이자 재야 역사연구가 모리 시게아키가 수십 년간 미군 포로들의 신원과 사망 경위를 조사해 유족에게 알렸다.

미국 정부와 군 기록을 살펴보면 원폭 투하 목적을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라는 한 문장으로 설명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 배경에는 일본의 항복을 압박하려는 군사적 목적에 신무기의 위력을 과시하려는 의도와 소련 견제 전략, 실제 도시에서의 파괴 효과를 확인하려는 계산이 겹쳐 있었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미국 정부·군 자료와 관련 연구를 바탕으로 원폭 개발부터 투하까지의 의사결정 과정을 시간순으로 살펴봤다. 여러 추가 기록을 참고해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본다.

독일 항복 뒤에도 멈추지 않은 원폭 개발

미국의 원폭 개발은 나치 독일이 먼저 핵무기를 만들 수 있다는 우려에서 출발했다. 나치 박해를 피해 유럽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유대계 과학자들은 1939년 8월 프랭클린 루스벨트 당시 대통령 앞으로 보낸 서한에서 독일의 핵무기 개발 가능성을 경고했다. 헝가리 태생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가 초안을 쓰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서명한 서한이었다. 미국은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인 1942년 8월 원폭을 개발하는 맨해튼 계획을 본격 가동했다.

독일은 원폭이 완성되기 전인 1945년 5월 8일 항복했다. 원폭 개발 명분이었던 독일의 핵 위협이 사라졌지만 맨해튼 계획은 중단되지 않았다. 이미 막대한 예산과 인력을 투입한 상태였다. 독일 항복 전부터 원폭의 실전 사용 대상은 일본이었다. 독일의 패색이 짙어진 1944년 9월 루스벨트는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와의 회담에서 원폭이 완성되면 일본에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의 비밀 문서에 서명했다. 이른바 하이드파크 합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1944년 9월 12일 캐나다 퀘벡에서 열린 제2차 퀘벡회담에서 만난 모습. 두 정상은 회담을 마친 뒤 미국 뉴욕 하이드파크에서 원자폭탄 개발·사용과 관련한 협의를 이어간 뒤 ‘하이드파크 각서’에 합의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1945년 4월 12일 루스벨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부통령이던 트루먼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때까지 트루먼은 원폭 개발의 전모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계획을 보고받았을 때는 원폭이 완성 단계에 와 있었다. 같은 달 27일 미군 장교와 맨해튼 계획 과학자들로 구성된 표적선정위원회가 첫 회의를 열고 일본 도시들을 대상으로 원폭 투하 후보지 선정 작업에 착수했다.

트루먼은 부통령이 되기 전 군사비 낭비를 점검하는 의회 특별위원회 위원장이었다. 당시 그는 의회 승인 없이 막대한 예산이 사용되는 극비 프로젝트가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조사를 추진한 적이 있었다.

요미우리는 “과거 군사비 낭비를 비판하는 위치에 있었던 트루먼은 원폭을 사용하지 않으면 20억 달러에 이른 개발비가 낭비되고 자신이 의회의 비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고 분석했다.

1945년 3월 전시 경제와 물자 동원을 총괄하던 제임스 번스 전시동원·전후전환국장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비밀 메모에서 “계획이 실패하면 가차 없는 조사와 비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었다. 번스는 트루먼 취임 후 핵심 자문역을 맡았고 그해 7월 국무장관에 임명됐다.

번스는 그해 5월 원폭 사용 등을 검토하기 위해 구성된 임시위원회에 트루먼 대통령의 개인 대표 자격으로 참여했다. 그는 6월 1일 회의에서 원폭을 일본에 가능한 한 빨리, 사전 경고 없이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표적으로는 노동자 주택에 둘러싸인 군수공장을 제시했다. 위원회는 이 방안에 동의했다.

일본 나가사키에 투하된 것과 같은 플루토늄 내폭식 원자폭탄. 지름 약 1.52m, 길이 약 3.25m, 무게 약 4.5t에 폭발력은 TNT 약 2만t에 해당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미국은 구조가 단순한 포신형 우라늄탄과 폭약으로 핵을 압축하는 내폭형 플루토늄탄을 함께 개발했다. 플루토늄 원폭은 7월 16일 뉴멕시코주 앨라모고도에서 실시한 인류 최초 핵실험에서 성능을 확인했다. 우라늄탄은 별도 폭발 실험을 하지 않았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먼저 투하된 원폭은 포신형 우라늄탄이었다. 플루토늄탄은 나가사키에 투하됐다.

원폭 사용 명령이 내려진 건 핵실험 성공 9일 뒤였다. 다음 날 일본에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이 발표됐다. 선언은 일본이 항복하지 않으면 ‘신속하고 완전한 파멸’을 맞게 된다고 경고하면서 답변 기한은 정하지 않았다.

회담 직전 항복 조건에서 빠진 천황제 존치

미국 정부 내부에는 원폭 사용 전 일본에 명확한 항복 기회를 줘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무차별 대량살상은 일본인의 증오를 불러일으켜 일본이 소련에 접근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는 우려가 깔려 있었다. 그렇게 되면 종전 이후 미국의 일본 점령 정책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주일 미국대사를 지낸 조지프 그루 국무차관은 천황제 존치를 인정하면 일본이 조기에 항복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원폭을 사용하지 않고도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헨리 스팀슨 전쟁부 장관도 그루의 조언을 받아 포츠담 선언 초안에 관련 문구를 넣었다.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주 앨라모고도 폭격시험장에서 실시된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 ‘트리니티’의 폭발 장면. 실험에 참여한 기술자 잭 에이비가 촬영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도서관·박물관

‘두 번 다시 침략을 기도하지 않을 것이라고 세계가 완전히 확신한다면 현재의 황통 아래에서 이뤄지는 입헌군주제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미 국무부 외교문서집을 보면 스팀슨 장관은 이 문구가 포함된 초안을 7월 2일 트루먼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스팀슨은 이 문구가 일본의 수락 가능성을 크게 높일 것이라고 설명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일본 지도부가 항복 과정에서 가장 중시한 조건도 천황제 유지였다. 일본 정부는 8월 10일 연합국에 보낸 공식 통고에서 “해당 선언이 천황의 국가통치 대권을 변경하라는 요구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양해 아래 수락한다”고 밝혔다. 사토 나오타케 주소련 일본대사는 7월 20일 도고 시게노리 외무상에게 보낸 전문에서 “평화 조건 가운데 우리가 유보하고 강조해야 할 것은 국체의 보호”라며 “이는 우리에게 절대적인 요구사항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포츠담 선언 초안 제12항에 포함됐던 천황제 존치 관련 문구는 회담 직전 삭제됐다. 번스가 “원폭을 투하할 때까지 항복 조건 완화를 보류해야 한다”고 트루먼을 설득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고 요미우리는 설명했다. 미 조지워싱턴대 국가안보기록보관소는 번스가 이미 천황제 존속 관련 문구를 빼는 쪽으로 이미 기울어 있었다고 해설했다.

요미우리는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거부해야 미국이 원폭 사용의 명분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해설했다. 천황제 존속 문구 삭제는 원폭 사용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장치였다는 주장이다. 일본계 미국인 역사학자 하세가와 쓰요시 UC샌타바버라 명예교수도 2005년 저서에서 “그(트루먼)에게는 원폭 사용을 정당화하기 위해 일본의 거부가 필요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미국·영국·소련 정상은 7월 17일 독일 포츠담에서 만났다. 향후 유럽 질서와 전후 처리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일본의 항복 조건과 소련의 대일전 참전 여부도 주요 의제였다. 이 회담은 앞서 몇 차례 연기됐다.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인민위원평의회 의장(왼쪽부터),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1945년 7월17일 독일 포츠담에서 회담 개막을 앞두고 함께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세 정상이 한자리에 모여 촬영된 첫 사진이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도서관·박물관

포츠담 회담 전날인 7월 16일 미군은 앨라모고도에서 원폭 실험에 성공했다. 트루먼은 포츠담에서 실험 성공 소식을 전해 들었다. 트루먼과 번스에게 원폭 실험의 상세 보고서를 읽어준 스팀슨 장관은 7월 21일자 일기에서 “두 사람은 대단히 기뻐했다. 대통령은 이 일로 크게 고무됐다”고 적었다.

포츠담에서 스팀슨은 트루먼에게 천황제 존속 문구가 일본의 선언 수락 여부를 좌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때는 이미 장제스 중화민국 국민정부 주석에게 전달돼 정식 문구를 수정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스팀슨은 일본이 이 문제로 수락을 주저할 경우 외교 경로를 통해 안심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트루먼은 이를 염두에 두고 처리하겠다고 답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온전한 도시·인구밀집지역 골라 원폭 효과 측정

맨해튼 계획에 참여한 과학자 사이에서도 원폭의 즉각적 사용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레오 실라르드를 비롯한 과학자 70명은 포츠담 회담이 열린 7월 17일 트루먼에게 청원서를 제출했다. 실라르드는 독일의 핵무기 개발 가능성을 경고하며 미국이 원폭 개발을 서두르게 한 서한의 작성자다.

이들은 일본에 명확한 항복 조건을 제시하고 먼저 항복할 기회를 줘야 한다고 요구했다. 일본이 항복을 거부하더라도 원폭 투하에 수반되는 ‘도의적 책임’을 진지하게 검토하기 전에는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 청원서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 전까지 트루먼이나 스팀슨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10년 넘게 기밀문서로 묶였다.

원폭을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에서 시범적으로 폭발시켜 일본에 위력을 보여주자는 방안도 거론됐다. 루스벨트도 하이드파크 합의 나흘 뒤 대통령 과학기술고문과 대화하며 “원폭을 실전에 사용하지 않고 일본 측 시찰단을 원폭 실험에 입회시켜 그 위력을 보여주고 위협하는 방법은 없겠느냐”고 말했다.

1945년 7월 17일 레오 실라르드를 비롯한 맨해튼계획 참여 과학자 70명이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려고 작성한 원폭 사용 반대 청원서. 일본에 구체적인 항복 조건과 항복 기회를 먼저 제시하라고 요구했지만 히로시마 원폭 투하 전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트루먼 행정부는 경고나 시범 폭발을 생략하고 인구가 밀집한 도시에 직접 사용하는 방안을 선택했다. 투하 도시를 선정한 미군 표적선정위원회의 기록에서 원폭 사용의 또 다른 목적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군은 ‘이전까지 공습을 받지 않은 온전한 도시’를 우선 후보로 골랐다. 기존 공습의 피해가 없는 곳에 투하해야 원폭 한 발이 가져온 파괴 효과를 구분해 측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후보지 선정 기준에는 평야지대이면서 ‘효과를 측정하기 쉬운 장소’여야 한다는 조건이 명시돼 있었다. 미군은 후보 도시들이 재래식 폭격으로 훼손되지 않도록 공습 금지 명령도 내렸다.

미군은 폭발 효과를 최대화하기 위해 대규모 시가지를 표적으로 삼았다. 후보지는 ‘지름 3마일(약 4.8㎞)이 넘는 대규모 도시 지역’이어야 했다. 심리적 충격을 주는 데 그치지 않고 한 발의 원폭으로 몇 명까지 살상할 수 있는지 확인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45년 4월 처음 검토된 후보는 도쿄만과 가와사키, 요코하마, 나고야, 교토, 오사카, 고베, 히로시마, 고쿠라, 나가사키 등 17개 지역이었다. 5월에는 교토와 히로시마가 최우선 목표인 AA등급으로 분류됐다.

교토는 인구 100만명의 대도시이자 일본의 옛 수도였다. 미군은 지식인이 많은 만큼 신무기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하고 투하에 따른 심리적 효과도 클 것으로 판단했다. 스팀슨이 강하게 반대하면서 교토는 최종 후보에서 제외됐다. 전쟁 전 방문한 적 있는 그가 교토의 아름다움에 매료됐기 때문이라는 일화는 유명하다. 1000년 넘게 조정이 있던 도시에 원폭을 떨어뜨리면 일본 국민의 반감을 사고 점령 정책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점도 제외 이유였다.

히로시마는 육군 병참기지와 항구가 있는 군사도시인 동시에 인구가 밀집한 도심이 넓게 형성돼 있었다. 주변 산이 폭풍을 한곳으로 모아 파괴력을 키울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됐다.

1945년 티니언섬에서 진행된 원자폭탄 투하 준비 작업 장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미군은 작은 군사시설을 정밀 타격하는 방식보다 도심 중심부에 원폭을 떨어뜨리는 쪽을 택했다. 원폭과 함께 관측기기를 낙하산으로 투하해 폭풍과 열선, 지상 온도 변화 등의 자료도 수집했다. 마지막까지 후보에 올랐던 니가타가 제외된 가장 큰 이유는 구름 등에 가려 원폭을 투하하지 못했을 때 대신 투하할 만한 적당한 도시가 인근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가사키는 7월 25일 교토를 대신해 원폭 투하 후보지에 포함됐다. 그전까지 재래식 폭격 금지 대상에 포함되지 않아 8월 1일에도 소규모 공습을 받았다. 8월 9일 작전의 주 목표는 고쿠라였지만 구름과 연무 등으로 육안 조준이 어려워지자 미군은 예비 목표였던 나가사키로 향했다.

이 같은 기록은 원폭 투하에 일본의 항복을 끌어내려는 목적뿐 아니라 신무기의 파괴력과 심리적 효과를 실제 도시에서 확인하려는 성격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일본의 항복만이 목적이 아니었다. 미군 표적선정위원회는 미국이 가진 핵무기의 위력을 국제사회에서 과시하고자 한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히로시마 원폭만으로 일본은 항복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 정부가 가장 의식한 상대는 소련이었다. 실라르드의 후일 회고에 따르면 번스는 원폭의 압도적인 파괴력을 보여주면 동유럽에서 영향력을 넓히던 소련을 다루기 쉬워질 것으로 생각했다. 전후 동아시아 질서를 둘러싼 협상에서도 미국이 우위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원자폭탄 투하 약 2년 7개월 뒤인 1948년 3월 17일 촬영된 일본 나가사키의 모습. 이 사진은 한때 열람이 제한됐다가 1959년 9월 10일 기밀이 해제됐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트루먼은 포츠담 회담 중인 7월 24일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총리에게 미국이 ‘이례적 파괴력을 지닌 신무기’를 보유했다고 알렸다. 일본과 중립 조약을 유지하고 있던 소련은 7월 26일 발표된 포츠담 선언에 참여하지 않았다.  있었다. 태세를 바꾼 건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직후다. 소련은 8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 후 다음날 만주 침공을 시작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버티고 있었다. 상황이 급격히 움직인 것은 소련이 대일전에 동참하면서였다. 소련의 중재를 통해 종전 협상을 시도하려던 일본의 계획은 무너졌다. 일본 정부는 같은 날 최고전쟁지도회의를 열고 포츠담 선언 수락 여부를 논의했다. 회의 도중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폭이 투하됐다.

두 차례 원폭 투하와 소련 참전 소식을 접한 뒤에도 일본 지도부의 의견은 갈렸다. 도고 시게노리 외무상과 요나이 미쓰마사 해군상은 천황제 유지만을 조건으로 선언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했다. 아나미 고레치카 육군상 등은 전범 재판과 무장 해제, 점령 문제까지 일본의 요구를 관철하지 못하면 본토 결전에 나서야 한다고 맞섰다.

이런 과정을 보면 포츠담 선언에 천황제 존치 문구가 포함됐더라도 일본 정부가 순순히 수용했으리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요미우리는 “국체 수호를 최우선으로 삼아 국민에게 막대한 희생을 안긴 일본 정부와 군부의 책임도 크다”고 지적했다.

전후 미국 전략폭격조사단은 일본 정부와 군 관계자들을 조사한 뒤 “원폭 투하, 소련 참전, 본토 침공 계획이 없었더라도 일본은 1945년 11월 1일 이전에 항복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을 내놨다. 이 판단은 이후 역사학계에서 논쟁의 대상이 됐다. 평가는 일본 지도부의 저항 의지 등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로 갈렸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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