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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호남누정원림-나주 영춘정] 문중 종회각서 마을 휴식처로…누정에 흐르는 ‘상생정신’

나주 영춘정은 조선 말 전의 이씨 종회의 목적으로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자에는 공동체의 유지와 계승을 위한 정신과 기능이 투영돼 있다.

[호남누정원림-나주 영춘정] 문중 종회각서 마을 휴식처로…누정에 흐르는 ‘상생정신’

[호남누정원림-나주 영춘정] 문중 종회각서 마을 휴식처로…누정에 흐르는 ‘상생정신’

[광주일보-한국학호남진흥원 공동 기획]

전의 이씨 집성촌의 종회각 역할

종친·동네 계 모임 등 화합의 장소

구한말 의병장 최익현 기록 편액

인근에 임란 순절자 이용제 정려각

신의·화목 기리는 발산마을 노래비도

2026년 09월 06일(일) 19:35

나주 영춘정은 조선 말 전의 이씨 종회의 목적으로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자에는 공동체의 유지와 계승을 위한 정신과 기능이 투영돼 있다.

나주 영춘정(永春亭)은 세지면에 있다. 남쪽에 자리한 세지면(細枝面)은 지명처럼 가느다란 가지의 모양이다. 지도상 세지면은 나주의 여느 지역보다 날씬하다. 남쪽으로 가느다랗게 뻗은 형국이 ‘세지’라는 지명과 부합한다. 우리 선조들은 지명 하나를 지어도 자연을 빗대 그렇게 멋스럽게 붙였다.

나주시 홈페이지에 따르면 세지면에 대한 소개는 대강 이러하다. 세지면은 나주의 동남쪽에 자리하고, 영산강 지류인 만봉천과 금천이 서부 쪽으로 흐른다. 자연적 환경이 우수하고 죽동리 일대에 넓은 농경지가 분포한다. 과실을 재배하기에 좋은 온화한 기후를 갖추고 있고 나주배는 물론 세지멜론이 많이 생산된다.

대개의 경우 누정은 당대 저명한 선비나 관직에서 물러난 관료가 자연과 벗하여 인생 만년을 보내기 위해 지었다. 아니면 후손들이 유허지에 선조들의 뜻을 기리고 유업을 받들기 위해 건립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농촌 지역의 정자는 다소 다르다. 공동체의 질서 확립을 위한 규범적 기능을 담당하는 데 방점을 뒀다. 저명한 선비의 음덕을 기리고 그의 학덕을 알리는 차원과는 달랐다. 문중의 종회(宗會), 동네의 동회(洞會)가 열리거나 계 모임을 위한 회합의 장소로서의 기능을 담당한 것이다. 공동체의 유지와 계승을 위한 규범이 일상에서 작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영춘정은 종회의 목적으로 지어졌다. 전의 이씨(全義 李氏) 집성촌에 건립돼 종회각으로 활용됐다. 건립 시기는 특정되지 않았으나 대략 19세기 말로 추정하고 있다. 누정은 이후 몇 차례 중수를 했으며 오늘의 모습에 이르렀다.

영춘정을 가다 그 명칭에 담긴 뜻을 생각해보았다. 긴 봄, 영원한 봄, 끝나지 않을 봄 등 의미로 해석된다. 봄은 생명을 지지하고 새로운 탄생을 함의한다. 누정에서는 그 뜻이 다함없이 이어지기를 바랐을 옛 사람들의 바람이 읽혀진다.

발산마을 노래비.

유난히 더웠던 올해 여름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바야흐로 이번 주는 9월의 초입에 들어선다. 맹위를 떨치던 여름이 물러난 자리에 시나브로 가을이 들어서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계절은 손바꿈을 한다.

우리의 삶과 일상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풀리지 않을 것 같던 문제가 어느 날 갑자기 해결되기도 하고, 좋아보이던 인간관계가 하루아침에 견원지간으로 바뀌기도 한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독재체제가 둑이 터지듯 일시에 무너지기도 한다. 그뿐인가. 정치에 있어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것은 세상사의 본질적인 단면을 보여준다.

가을의 언저리에서 봄을 생각한다. 그것도 영원한 봄의 시간과 봄의 이미지를. 하지만 하늘아래 영원한 것은 없으니 영원한 봄도 없는 것은 자명할 터다. 가을에서 봄을 생각하며 들어선 영춘정은 멋스러우면서도 웅장한 자태로 길손을 맞는다.

단층에 골기와를 얹은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구조다. 널찍한 대청마루가 걸림이 없는 시원함을 준다. 규모가 커서 예전에는 이곳에서 마을 행사나 동회, 계 모임이 자주 열렸을 것 이다. 몇 개 목침이 놓여 있는데 마을 어르신들이 더위를 피해 휴식을 취했던 모양이다.

전체적으로 건물 관리가 잘 돼 있다. 마을 초입 언덕에 자리해 앞쪽이 내다보이고 풍경도 시원하게 들어온다. 수확철인 가을에는 저 멀리 노랗게 익어가는 벼와 탐스럽게 익어가는 가을 과실들의 자태가 눈을 즐겁게 했을 거였다. 정자 내부에는 구한말 정치인이자 의병장인 최익현(1833~1906)의 ‘영춘정기’(永春亭記)가 편액돼 있다. 이 기록을 근거로 대략 건축의 시기를 가늠해볼 수 있다.

면암 최익현은 포천 출신으로 단양에서 성장했으며 이항로의 문인으로 알려져 있다.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급제했으며 1868년(고종 5)에 장령에 이어 돈녕부 도정을 역임했다. 1873년(고종 10) 동부승지로 기용된 그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등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다.

누정에서 느껴지는 확 트인 개방감.

최익현과 나주와의 인연은 1876년(고종 13) 일본과의 통상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린 것과 관련이 있다. 면암은 그 상소를 계기로 나주로 유배됐다. ‘영춘정기’의 시작은 ‘영춘정은 금성 동쪽 발산에 소재하고 전의 이씨가 은퇴 후 여생을 보낸 고시다. 춘추의 계절에는 집회를 개최해 신의와 화목을 도모했다’로 기록돼 있다.

노사 기정진도 ‘영춘정후기’(永春亭後記)를 남겼고 송사 기우만도 ‘영춘정기’(永春亭記)를 남겼다. 후석 오준선도 ‘영춘정기’(永春亭記)를 비롯해 ‘차이씨영춘정운’(次李氏永春亭韻)이라는 글을 남겼다.

한편 누정이 자리한 마을 입구에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이용제를 기리는 정려각이 있다.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이용제의 충절과 고귀한 뜻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영조 때 정려를 내렸으며 이후 정조 때 정려각이 건립됐다.

이용제 정려각과 멀지 않은 곳에는 발산마을 노래비와 명창 이순호선생 소리비가 세워져 있다. 금천천과 인접한 비옥한 농지와 선조들의 신의와 화목의 정신이 면면히 내려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잠시 영춘정 마루에 걸터앉아 지난 시간을 돌아본다. 유난히 무더웠던 올 여름도 가뭇없이 지나가 버렸다. 위세 당당하던 폭염도 한 철의 더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끝나지 않는 고난도, 영원한 즐거움도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한 것은 현재를 살고 있다는 것이며 그 현재에 충실한 것 외에는 그 무엇도 만족감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조금씩 노랗게 물드는 저 들녘의 수런거리는 벼들이 그렇게 속삭이는 것 같다.

시나브로 다가온 가을 초입에서 벌써부터 다가올 봄을 기다린다. 영춘정에서 봄을 기다리며 봄 같은 세상을 꿈꿔 본다. <끝>

/글·사진=박성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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