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 산업 ‘남방한계선’ 넘어서려면…
현실은 기흥이 취업 마지노선
핵심 인재 머물 인프라 준비를
지난 6일 삼성전자 기흥캠퍼스 내 통근버스 정류장에서 직원들이 서울 등지로 가는 버스에 탑승하고 있다. 김세훈 기자
광주과학기술원(GIST)에서 반도체 분야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한모씨(26)는 학위를 마치면 서울로 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현재 광주에서는 한씨가 전공한 반도체 회로 연구와 관련된 일자리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전공을 살리기 위해서는 수도권으로 올라가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 “업계에서는 지역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서울로 올라간 사람들에 비해 역량이 다소 떨어진다고 보는 분위기도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취업 기회뿐 아니라 문화생활이나 대인관계 역시 청년들에겐 수도권과 비수도권 격차가 크다. 전주에서 대학을 나와 천안의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는 정모씨(28)는 “전시회 등 문화생활을 즐기거나 친구를 만나는 장소는 결국 서울”이라며 “천안은 비록 수도권 밖이지만 용산역까지 KTX로 40분 만에 이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메리트가 있다”고 말했다. 같은 지역의 다른 반도체 엔지니어 A씨도 “대학생활을 수도권에서 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연봉보다 서울과의 거리가 직장 선택에서 더 중요하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지난 6일 오후 5시30분 삼성전자 기흥캠퍼스 앞 통근버스 정류장. 강남·논현, 양재·서초, 사당으로 가는 버스 라인에 긴 줄이 생겼다. 안내요원의 호각소리에 맞춰 직원들을 태운 버스가 출발하자 곧이어 또 다른 버스가 라인을 채웠다. 직원들 사이에 ‘만남의 광장’으로 불리는 이곳에서는 오전 4시30분부터 오후 11시20분까지 수도권 내 주요 거점으로 가는 셔틀버스가 운행된다. 정류장의 라인 28개 중 6개는 특히 서울로 직행하는 버스다.
정류장 안내요원 B씨는 “양재역행 버스의 경우 피크타임인 오후 5시부터는 10분 단위로 버스가 오는 편”이라며 “서울로 출퇴근할 때는 자차보다 빠른 편이라 직원들의 선호도도 높다”고 전했다.
정보기술(IT) 업계에서는 삼성전자 기흥캠퍼스가 있는 경기 용인시 기흥 일대를 이른바 ‘인재의 남방한계선’으로 부르기도 한다. 서울에서 일정 거리 이상 남쪽으로 내려가면 기업이 고급 인력을 채용하기 어려워진다는 통설을 반영한 말이다. 서울을 오가는 통근버스도 서울과의 ‘심리적 거리’를 줄여 인재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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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유입 ‘평택 모델’ 따르려면…‘교통·교육·문화’ 뒤따라야
호남 반도체 마지막 퍼즐 ‘인재’
평택, 반도체 공장 들어서자
7년 새 사업체 66% 이상 늘고
경제활동인구도 대폭 증가
삼전닉스 들어서게 될 광주
관련 산업 생태계 집약하고
지역 간 이동 시간 단축 과제
자녀 교육·소비 환경 등 갖춰
온 가족이 뿌리내리게 만들고
반도체 인재 양성해야 ‘자생력’
정부가 ‘서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부지를 광주로 낙점하고 조성 속도전에 들어간 가운데 ‘인재 확보’ 또한 사업 성패의 핵심 과제로 떠올랐다. 전공정(웨이퍼 위에 트랜지스터 등을 만들고 회로를 형성하는 것)이 포함된 반도체 클러스터에는 첨단 제품 연구·개발(R&D)은 물론 공정·장비·품질·운영 부문까지 폭넓게 인력이 필요하다.
반도체 클러스터 운영의 성패도 남방한계선을 넘어 고급 인재를 확보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교통망 확충과 같은 물리적 인프라부터 양육·교육 여건, 지역의 인재 생태계 조성 등이 모두 만족돼야 공고한 수도권의 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
“네트워크 단절 걱정…다시 수도권으로”
기업들은 “남방한계선이 현실적인 장벽”이라고 입을 모은다. 지역에서 원하는 인재를 찾기도, 수도권에서 배출된 인력을 지역으로 정주시키기도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판교의 한 IT 업체 관계자는 “지방과 수도권은 인재풀이 완전히 다르다.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고급 인력을 찾는 기업 입장에서는 수도권 외 선택지가 많지 않다”며 “또 지역 인재를 육성해도 결국 경력을 쌓으면 수도권으로 옮겨갈 수 있다는 불안감도 있다”고 말했다.
다른 IT 대기업 관계자도 “관계사 미팅이 서울 강남이나 여의도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며 “업계 전문가나 거래처와의 관계망이 서울을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 보니, 그 네트워크 밖에서 인재를 찾는 데 따른 불확실성이 크다”고 했다.
광주의 한 가전 분야 시니어 엔지니어 C씨는 “지방에서 인재 채용의 가장 큰 걸림돌은 인식”이라며 “젊은층에서는 수도권에서 대학을 나와 지방으로 가는 것을 ‘뭔가 잘 안 풀린 것’처럼 보는 분위기가 있다”고 전했다.
전체 청년층 이동 통계에서도 수도권 집중은 뚜렷하다. 19~34세 청년인구는 2024년 기준 수도권으로 6만1490명이 순유입됐다. 반면 경남(-1만2516명), 경북(-8708명), 전북(-7897명) 등은 청년인구가 큰 폭으로 빠져나갔다.
이들이 수도권으로 향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물론 일자리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2024년 청년층 1인 수도권 순유입자의 약 94%(5만7500명)가 ‘직업’(중복선택)을 이유로 이동했다.
기업은 인재 수급을 이유로 수도권에 모이고, 인재는 다시 기업이 몰린 수도권으로 향한다. 기업과 인재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순환고리가 만들어진 모습이다.
교통 인프라 개선 지금부터 시작해야
광주가 이런 남방한계선을 뚫고 수도권 인재를 끌어올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란 ‘앵커(선도)기업’이 자리 잡는 만큼 기존의 통념을 깰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민재 GIST 반도체특성화대학원장은 “SK하이닉스가 중국의 인텔 낸드플래시 사업을 인수했을 때도 높은 연봉을 보장하니 고급 인재들이 몰렸다”며 “남방한계선은 기업들이 인력 수급 문제를 쉽게 해결하려고 만든 편의적 개념에 불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경기 평택과 충남 천안에 반도체 공장이 들어선 이후로 주변 인재풀이 확장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평택시의 사업체 수는 삼성전자 평택캠퍼스가 처음 양산에 돌입한 2017년 기준 3만8831개에서 2024년 6만4714개로 66% 넘게 증가했다. 경제활동인구도 23만7800명에서 지난해 하반기 기준 36만4000명으로 53% 늘었다.
다만 수도권인 평택의 사례를 그대로 광주에 이식하기에는 교통 여건 등 걸림돌이 적지 않다. 수도권의 한 교수는 “콘퍼런스나 행사를 해도 여수에서 하면 하지, 광주에서 하면 교통이 불편하다는 반응이 많다”고 말했다. 정씨는 “주변에서는 ‘광주로 내려가게 되면 본인만 방을 구해서 살아야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전했다.
실제 반도체 클러스터 가동까지 교통 인프라를 확충하는 작업도 병행돼야 한다. KTX 증편·배차 간격 조정 등 철도망을 개선하거나, 정부가 메가프로젝트의 3대 축으로 함께 제시한 충청·영남권과 쉽게 오갈 교통망을 설계하는 방식 등이 거론된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금까지는 산단을 먼저 만든 뒤 교통 여건을 마련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러면 한동안 ‘섬’ 이미지를 벗어나기 어렵다”며 “지금부터 교통망 논의에 착수해 실제 클러스터 구축 시기와 인프라 구축 시기를 맞추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마강래 중앙대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는 “서울과의 거리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전국적 산업 생태계와 지역별 가치사슬을 연결하는 방향으로 교통망을 설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양육 → 교육 → 실무’ 자생적 생태계 구축
인재가 지역에 계속 머무르게 하기 위해서는 광주 내 정주 여건 개선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는 지난달 29일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지방에서 근무하고 가족은 서울에 남는 ‘주말부부’가 생길 수 있다. 수도권으로 가지 않아도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면 조기 정착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마 교수는 “당장은 높은 보수가 지역 이주의 요인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며 “문화적 기회와 소비 등 상업 기회, 자녀를 교육할 기회, 다른 사람들과 교류할 기회가 함께 구축돼야 한다”고 했다.
특히 교육 인프라 재설계가 인재 확충의 성패를 가를 변수로 꼽힌다. 이런 면에서 삼성전자 등이 2014년 아산에 설립한 충남삼성고등학교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학교는 임직원 자녀들을 대상으로 우선선발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자녀 교육을 위해 서울을 떠나길 꺼리는 직원들이 많다는 점을 고려한 제도다. 평택시도 고급 인재를 유치하기 위해 국제학교 개교를 2030년 목표로 진행하고 있다.
A씨는 “가정이 없는 사람에게는 성과급이나 추가 보수가 가장 큰 메리트가 될 수 있지만, 가정이 있는 사람에게는 자녀 교육 관련 지원이 중요하다”며 “아산 삼성고처럼 임직원 자녀 교육과 관련한 복지가 생기면 이동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중장기적으로는 R&D와 실무형 인재 양성 체계를 구축하는 것도 중요하다. 처음에는 다른 곳의 인재를 끌어오는 방식으로 인력을 충원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지역이 자생적으로 인재를 만들어내는 단계로 올라서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도 연구·교육 기반은 어느 정도 갖춰져 있다. 광주에는 GIST 등이 연구중심대학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GIST는 최근 ‘GIST-Arm 스쿨’을 통해 5년간 총 1400명의 실무형 인재를 양성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2024년부터 연간 30명 규모로 삼성전자와 채용연계형 반도체공학과도 운영하고 있다.
감사원에 따르면 현재 인력 양성 정책으로는 2031년까지 최대 약 8만1000명의 반도체 인력이 부족할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대규모 투자를 반영하면 인력 부족은 더 심화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인력 부족이 위기이자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반도체 인재 부족을 해소할 교육기관을 갖추면 기업들의 유인도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마 교수는 “과거 공공기관 이전 때 지역대학에 공공기관 채용 쿼터제를 운영했는데 대학의 인기도 올랐다”며 “주요 앵커기업이 앞장서 계약학과를 확대해나가면 대학 진학을 위해 수도권으로 떠날 필요도 없고, 인재들이 지역에 머무는 자생적 생태계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대학 한두 곳이 인력 수급을 담당하는 게 아니라 전남대, GIST, 조선대 등이 모인 연합대학 체계를 꾸리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이 교수는 “지방정부가 앞장서 교육부와 협의하는 등 움직임을 보이면 ‘과연 될까’라고 생각하며 관망하던 기업들도 움직일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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