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국난은 대체로 세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외적의 침입, 내부의 반란, 그리고 국제 질서의 급변이다. 북쪽에서 대륙 세력이 침략한 거란의 2차 침입 때 고려 현종은 남쪽 나주까지 피난했고, 남쪽에서 일본이 침략한 임진왜란 때 선조는 의주로 몽진했다. 이괄의 난 때 인조 역시 서울을 떠나 공주로 옮겼다. 전선의 이동에 따라 수도와 정부 기능도 함께 이동하며 국가를 유지했다.
이러한 역사의 반복은 한국전쟁에서도 이어졌다. 전쟁 기간 정부는 부산으로 두 차례 이동했다. 1950년 7~8월 부산으로 피난했다가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서울로 복귀했다. 그러나 1·4 후퇴로 다시 서울을 잃으면서 부산으로 재이동했다. 3년 1개월여의 전쟁 기간 동안 부산은 상당 기간 국가 운영의 중심이 된 사실상의 전쟁 수도였다.
부산이 수도였다는 사실은 이름이 아니라 기능으로 확인된다. 부민동 임시수도 정부청사에서는 대통령 집무와 국무회의가 이루어졌다. 원래 자혜병원(부립병원)으로 지어지던 이 건물은 도청 이전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급히 도청사로 용도가 변경되었고, 이후 6·25 전쟁 때는 임시수도 정부청사로 쓰이게 되었다."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부산항은 외부와 연결되는 생명선이었고, 경부선 철도는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나르는 국가의 동맥이었다. 전쟁 초기 대한해협 해전에서 해군 백두산함이 북한 수송선을 격침하며 해상 침투를 차단한 것은 낙동강 방어선 유지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해군 부인들이 삯바느질로 모은 돈까지 보태 마련한 이 군함이 없었다면 부산은 후방이 아니라 전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부산은 몽골 침입 때 바다를 방패 삼았던 강화도처럼, 바다가 지켜낸 도시였다.
겉으로 드러난 인구 증가만 보면 부산의 성장은 긍정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성장은 국가적 혼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1937년 부산 인구는 약 21만 명이었으나, 광복 이후 귀환 동포가 유입되었고 한국전쟁으로 약 50만 명의 피난민이 몰려왔다. 특히 1·4 후퇴 이후에는 약 70만 명이 추가로 유입되면서 도시 상황은 급변했다. 군인·경찰·공무원 가족 등 신분이 확인된 경우에만 부산 입성이 허용되었고, 나머지는 거제·제주 등지로 분산 수용되기도 했다.
부산역 방향에서 오르면 이바구길이 이어진다. 허정, 박순천, 박재혁, 유치환, 장기려 같은 인물들의 흔적이 남아 있고, 초량초등학교에서는 나훈아, 박칼린, 이경규 같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초량교회는 1892년 한강 이남 최초로 세워진 교회로 한국기독교 역사 사적지 제3호다. 일제강점기에 주기철 목사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신앙을 지켰던 곳이다. 1936년에는 안창호 선생이 방문했고, 피난 시절에는 이승만 대통령도 이곳을 찾았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