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부터 아이돌 데뷔를 준비하던 한지은 페이브먼트 대표는 K팝 산업 한가운데에서 내부자로 참여해왔다. 팬들의 변화를 가까운 현장에서 지켜본 한 대표는 “K팝 팬덤은 더는 콘텐트를 소비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며 “팬을 한국을 찾는 관광객이 아니라 감정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사용자로 바라본 순간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고 말했다.
한지은 페이브먼트 대표. 한 대표는 “관광은 이제 ‘어디를 가는가’에서 ‘무엇을 경험하는가’로 이동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정훈 기자
무대에 서는 대신, 무대 뒤에 남았다. 아이돌 데뷔를 준비하다가 멈춰 선 순간이, 오히려 새로운 전환점이었다. 한지은 페이브먼트 대표에게 데뷔를 준비했던 경험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는 계기가됐다.
“다섯 살에 음악을 시작해서 열다섯 살부터 아이돌 데뷔를 준비했지만 시기를 놓쳤어요. 스무 살이 넘으면 사실상 데뷔가 어렵거든요. 이후 연기나 뮤지컬 등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죠.”
‘세상에 하나뿐인 다이아몬드가 되겠다’는 희망은 어느새 지독한 회의로 번졌다. 무대 위에서 성공했다고 한들 ‘본모습은 숨긴 채, 겉으로만 반짝이는 다이아몬드가 됐을 것’이라는 회한도 몰려왔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드러내고, 그를 통해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내가 진짜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기 시작했고, 결국 데뷔가 아닌 취업을 결정했죠.”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아이돌과 스타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을 둘러싼 팬과 스태프, 수많은 기획과 제작 과정이 함께 무대를 만들어가는 구조다. 삶의 방향을 튼 한 대표는 이후 해외 명품 자동차 브랜드와 국내 유수의 엔터테인먼트 기업에서 일했다. 이론적 깊이를 더하기 위해 학사와 석사 과정에서 경영학과 창업학을 공부했다. 취업에 이어 사업의 기반을 다진 시기이기도 했다. 한 대표는 “기업과 학문을 접할수록 하루빨리 창업에 나서고 싶다는 꿈이 커졌다”며 “특히 스타트업 창업에 매력을 느껴 창업학을 따로 공부했다”고 말했다.
특히 몸담았던 엔터테인먼트 기업에서 다양한 경험을 한 것은 현재 한 대표의 커리어에 중요한 토대가 됐다. 스타의 맞은편에 서 있는 팬덤 관련 업무를 맡으면서, 팬과 콘텐트의 관계를 더욱 가까이에서 이해하게 됐다. 팬을 단순히 콘텐트를 소비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고 참여하는 주체로 바라보게 된 점은 취업 후 얻은 가장 소중한 인사이트가 됐다. 이러한 인식은 이후 사업 방향을 결정하는 출발점이 됐다.
“팬덤의 소비는 단순한 구매 행위가 아닙니다. 아티스트에 대한 큰 애정과 감정적 유대에 기반을 둔 소비죠. 팬들은 단순한 상품이나 콘텐트 자체보다 아티스트와의 관계를 기반으로 소비를 이어갑니다.”
이러한 특성은 여행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아티스트가 다녀간 장소를 찾아 한국까지 방문하는 팬이 많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안내하는 여행 서비스는 없었다. 한 대표는 “정보는 흩어져 있었고, 같은 팬이라도 누군가는 깊이 있는 경험을, 누군가는 장소 방문만 원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팬 하나하나의 행동을 이해하는 과정이 쌓이자, 팬 기반 여행이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라는 인식에 도달했다.
“한국은 K팝, K드라마, K뷰티 같은 콘텐트를 매개로 전 세계 사람들이 찾아오는 매력적인 나라입니다. 수많은 콘텐트를 더욱 팬 친화적인 방식으로 연결할 수 있다면 이전에는 보지 못한 큰 가치를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시장에는 아직 이런 흐름을 뒷받침할 체계적인 서비스가 없었다. SNS와 커뮤니티에 의존한 정보에 따라 경험의 깊이가 달라지는 흐름도 보였다.
“팬덤 여행의 본질적인 문제는 정보의 비대칭성이었습니다. 일부 팬들만 알고 있는 정보가 비공식적인 커뮤니티 안에서 공유되다 보니, 같은 팬이라도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 상황이 반복됐습니다. 문제는 단순한 정보 부족이 아니었죠.”
기존 관광 방식이 팬의 행동과 의사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구조적 한계는 창업으로 이어졌다.한 대표가 창업한 페이브먼트는 팬덤 기반 여행 플랫폼 ‘셀레트립(Celetrip)’을 운영한다.
팬덤 관광의 변화, 경험으로 이동
한 대표의 설명처럼 팬들은 아티스트가 다녀간 장소를 직접 찾아가고, 같은 공간에서 유사한 경험을 하며 ‘성지순례’라는 새로운 여행 방식을 만들어냈다. 이는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아티스트와 심리적 거리를 좁히려는 행동이다. 하지만 기존 관광 정보는 장소 나열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어디를 가야 한다는 정보는 제공하지만, 그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부족했다.
“K팝과 관련해 서울에 대한 설명 100개보다, 내가 좋아하는 특정 아티스트에 대한 설명 2~3개가 훨씬 더 값어치 있습니다. 예를 들어 A 아티스트의 팬덤은 K팝 전반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그 아티스트에 대한 정보만 원해요. 그런데 관련 없는 정보까지 계속 노출되면 피로감이 생기고, 결국 서비스를 떠나게 됩니다.”
한 대표는 “팬덤 관광의 핵심은 장소가 아니라 경험, 내가 좋아하는 스타와 연결되는 것”임을 깨달았다. 팬들은 아티스트가 했던 행동을 따라 하고, 같은 음식을 먹으며,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심리적 거리를 좁히길 원했다.
“팬들은 스타와 함께하는 경험을 공유하고 싶어 해요.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가 갔던 장소에서 같은 자세로 사진을 찍고 같은 프레임 안에서 그와 함께 있는 것처럼 느끼고 싶어 하죠. 그가 머물렀던 장소에서 같은 음식을 먹는 등 같은 행동을 따라 하면서 경험을 재현하려고 합니다.”
한지은 페이브먼트 대표. 김정훈 기자
이 공백을 메운 것이 한 대표가 설계한 팬덤 기반 여행 플랫폼 셀레트립이다. 셀레트립은 아티스트의 방문지와 행동, 스토리를 데이터로 구조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팬 맞춤형 여행 경로를 설계한다. ‘아티스트가 이곳에서 무엇을 했는지’까지 경험하게 하는 것이 핵심이다. 온라인 여행 서비스인 OTA(Online Travel Agency)가 이미 존재하는 여행 수요를 연결하는 역할이라면, 셀레트립은 팬덤이라는 감정 기반 수요를 여행으로 전환하는 데 집중한다.
셀레트립은 팬의 행동 양식을 기준으로 데이터를 필터링하고 탐색부터 이동, 체험까지 이어지는 전체 여정을 설계한다. 아티스트별 방문지, 콘텐트, 행동 데이터를 축적하며 팬 경험에 특화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단순 장소 정보가 아닌,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까지 포함된 맥락 중심 데이터라는 점이 특징이다. 협업 아티스트에는 정용화, 피원하모니(P1Harmony), QWER 등 여러 K팝 아티스트가 포함돼 있다. 지난 3월 28~29일 이틀간은 ‘2026 정해인 팬미팅’ 공식 판매사로 참여해 티켓 패키지 판매와 현장 부스를 운영하며 온오프라인을 아우르는 팬 접점을 구축하기도 했다.
“팬덤 여행 사업은 기술이 아니라 관점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팬을 단순한 관광객이 아니라 감정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존재로 바라보는 순간, 이들이 왜 한국을 찾는지 그 의미가 보입니다. 팬들은 콘텐트를 소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직접 이동해 같은 경험을 하려고 합니다. 이 시선의 전환이 기존 관광과 다른 지점을 만들어냅니다. 콘텐트를 중심으로 한 팬덤 관광은 콘텐트 산업과 관광산업의 경계를 허물며, 관광을 ‘어디를 가는가’에서 ‘무엇을 경험하는가’로 이동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실제 서비스 설계와 성과로도 이어진다.
문체부와 중기부도 주목한 플랫폼 셀레트립
팬덤 기반 여행 플랫폼 셀레트립은 정부 부처에서도 주목하고 있다. 콘텐트 기반 관광 수요를 실제 방문과 경험으로 전환하는 흐름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콘텐트·관광 연계 사업에 선정됐으며, 현재 서울관광재단 입주 기업이기도 하다. 셀레트립의 대표적인 기능은 음성 도슨트다. 이용자가 특정 장소에 도착하면 GPS 기반으로 위치를 인식해 자동으로 음성 안내가 제공되며, 해당 공간에서 아티스트가 무엇을 했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스토리 형태로 전달한다. 예를 들어 한강과 같은 장소에서도 단순히 명소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곳에서 이런 시간을 보냈다, 이 경험을 해봐라”라는 식으로 안내가 이루어진다. 마치 아티스트가 직접 여행을 안내하는 듯한 경험이다.
현재 아티스트의 음성을 한국어로 제공하고, 외국어 이용자에게는 번역된 스크립트를 함께 제공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기술적으로는 AI 기반 더빙을 통해 다양한 언어로 음성을 구현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이를 도입하지는 않았다. 한 대표는 “기술적으로는 충분히 구현할 수 있지만, 팬들이 받아들이는 방식은 다르다”고 설명했다.
“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실제로 사용하지 않는 언어로 말하는 것에 어색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특정 아티스트가 평소 한국어로만 소통해왔는데, 갑자기 같은 목소리로 외국어를 구사하면 오히려 몰입이 깨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팬들의 반응도 엇갈린다. 일부는 자국어로 제공되는 음성을 선호하지만, 더 많은 팬은 원어인 한국어로 듣는 것을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였다. 한 대표는 “팬 입장에서는 그 아티스트가 한국어로 말하는 모습 자체도 경험의 일부”라며 “언어를 바꾸기보다 원래의 목소리와 맥락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AI 음성에 대한 거부감이 점차 낮아지고 있는 만큼 향후에는 더욱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서비스를 확장할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 이런 점을 인정받아 페이브먼트는 2025년 중소벤처기업부의 팁스(TIPS) 프로그램에도 선정됐다. 업계에서는 “팬덤 데이터를 기반으로 경험을 설계하고 이를 기술적으로 구현해 실제 관광 수요로 전환하는 구조가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평가했다.
현재 서비스는 일부 주요 관광지에 적용되지만 향후 적용 지역과 콘텐트 범위를 점차 확대해나갈 계획이다. 팬덤 기반 여행은 서울을 넘어 지역으로도 확장되고 있다. 한 대표는 “명확한 동기와 감정적 연결을 중시하는 팬들은 시간과 비용을 더 들여서라도 지방까지 이동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실제로 특정 아티스트의 촬영지나 방문지, 고향 등으로 이동하는 흐름이 나타나며 콘텐트를 접목한 경우 지역 방문 증가율이 유의미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는 관광 수요가 특정 도시를 넘어 지역으로 확산하는 흐름을 보여준다.
플랫폼 셀레트립 이미지. 셀레트립은 GPS 기반 음성 도슨트 서비스를 제공한다. 한지은 대표는 “팬을 단순한 관광객이 아니라, 감정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존재로 바라본 순간 여행의 의미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사진 페이브먼트]
관광의 팬덤화, 산업을 바꾸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출발한 문제의식은 결국 관광의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팬들은 더는 콘텐트를 소비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산업 전체를 움직이는 대상이에요. 하지만 산업은 아직 이 부분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아티스트가 직접 상품을 만드는 것은 아니고 실제 공급은 소속사와 산업 구조를 통해 이뤄집니다. 그런데도 팬들은 소속사에 대한 호불호와 별개로, 아티스트에 대한 애정이 유지되는 한 소비를 멈추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팬을 위한 서비스가 충분히 설계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산업이 커질수록 상업적 구조는 강화되지만 팬 경험에 대한 고려는 상대적으로 부족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 대표는 “팬을 향한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 우리의 방향성”이라며 “단순히 상업적으로 접근하는 서비스라면 차별점이 없다”고 강조했다.
“더 팬덤 친화적인 접근으로, 팬들이 실제로 원하는 경험을 제공하고 싶습니다. 현재는 관광을 중심으로 서비스를 전개하고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팬을 위한 다양한 서비스로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음성 기반 커뮤니케이션, 굿즈 등 팬 경험을 중심으로 한 영역 전반으로 확장 가능성을 보고 있습니다. 현재 이와 관련해 특허도 준비 중입니다.”
최근에는 외국인 셀럽과도 협업을 추진하며 팬 경험을 글로벌 단위로 확장하는 전략도 모색하고 있다. 특정 아티스트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콘텐트와 인물을 기반으로 한 경험 설계로 확장하려는 시도다. 콘텐트는 더는 홍보 수단이 아니라 이동과 소비를 유발하는 핵심 동력으로 작동하고 있다. 전 세계 소비 구조가 팬덤 중심으로 재편되는 흐름 속에서 관광도 그 영향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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