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가 해나 아렌트는 나치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를 총괄했던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본 뒤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을 제안했다. 당시 아이히만은 자신의 행위가 독일법상 불법이 아니었고, 자신은 성실하고 진정성 있게 국가의 명령을 따랐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아이히만은 인류 역사에 없던 대학살에 큰 책임이 있음에도 단 한 번도 희생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거나 사과하지 않았다.
윤석열은 왜 반성하지 않을까?
우리의 상황도 비슷하다. 두 달 뒤면 온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던 비상계엄 사태가 2주년을 맞이하지만, 그 책임자는 사과는커녕 그 정당성만을 주장하고 있다. 탄핵심판 때와 1심 선고 때의 윤석열 최후진술문을 비교해서 읽어봤다. 탄핵심판 때의 최후진술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북한’과 ‘안보’라는 단어를 각각 15번, 13번이나 쓰며 비상계엄의 정당성을 항변했다. 윤석열은 과거의 계엄과 달리 “무력으로 국민을 억압하는 계엄이 아니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1심 선고 때의 최후진술은 탄핵심판 때 쓰지 않았던 ‘내란몰이’라는 단어를 13번이나 사용한다. 여러 증언들을 무시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내용만을 나열하는 건 여전했는데 결론에서는 “계몽” “계몽령”이란 단어가 새롭게 등장한다. 대국민 호소가 계몽으로 바뀌면서 사과의 가능성은 더욱더 사라졌다.
탄핵심판 때의 최후진술이 수세적이었다면, 1심 선고 때의 최후진술은 다분히 공격적이다. 더불어민주당을 지칭하던 “거대 야당”이란 표현이 “반헌법적인 국회 독재”로 변하고, 계엄은 “엄중한 책임감”에서 비롯된 “대통령의 국가긴급권 행사”로 주장된다. 사법부의 관료 출신다운 상투적인 표현이 반복되고, 변론보다 자신의 지지층을 겨냥한 정치선전이 이어진다. 재판 결과가 하나씩 나와도 반성하지 않는 건 정권이 바뀌면 해석이 달라질 거란 기대를 반영하는 듯했다.
자신은 헌법상의 권한을 책임 있게 행사했을 뿐이라는 윤석열의 주장은 불법을 저지르지 않고 성실하게 국가의 명령을 이행했다는 아이히만의 주장과 닮았다. 마치 계엄을 통치술의 일부인 양 언급할 수 있는 건 그가 한국 현대사에서 계엄에 희생되었던 피해자의 편에서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희생자가 없었다는 주장 또한 권력을 행사하는 편의 입장이지 그날 밤 맨몸으로 군경과 맞섰던 시민들의 입장과 전혀 다르다.
이미 재판과정에서 여러 증거와 증언이 나왔음에도 왜 윤석열은 이런 태도를 보일까? 그는 과대망상증 환자일까, 아니면 최후의 발악일까? 여전히 그를 지지하거나 이제 계엄 얘기는 그만하자는 사람들은 또 어떤 생각일까? 사람의 속내를 알 수는 없지만 그나 그 지지자들을 괴물이나 악인의 망상으로 몰아가면, 대통령이라는 막강한 권력과 그 지지층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이유를 파악하기 어렵다. 악인화는 그것을 탄생시킨 배경과 여전히 그것에 기생하고 있는 정치의 문제를 보이지 않게 만든다.
내란몰이란 말로 은폐된 무능 정치
당시 아렌트는 아이히만만이 아니라 그들과 협력했던 상층 유대인들의 행태도 날카롭게 지적해서 유대인들의 분노를 샀다. 나치를 소극적으로 지지하거나 묵인했던 다수의 독일인들, 그들과 협력했던 소수의 유대인들도 타자의 처지에서 사유하지 않았다. 아렌트는 자신을 일방적인 희생자로 설정하고 상대를 악마화하는 것이 파괴된 세계를 복구하는 데 이롭지 않다고 봤다.
내란몰이라는 말이 정치적인 수사로 이용되면서 비상계엄에 소극적으로 동조하거나 그것을 묵인했던 정치인들이 다시 마이크를 잡고 있다. 윤석열과 계엄계획을 공유했던 한 패가 아니라면 그들은 이 사태에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 사실 계엄을 반대했다며 자신을 정의의 수호자 위치에 놓는 정치인들조차도 비상계엄 이전의 무능한 정치를 구성했던 일부였다. 소수의 단죄가 필요하더라도 이 사태와 관련된 다수의 반성과 성찰 없이는 사태의 종결이 어렵다. 지금의 정치적 교착상태가 혼란스럽게 이어지는 건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종교와 군대의 정치 개입 금지라는 근본 원칙이 훼손된 문제는 더 깊이 다뤄져야 한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건 특검이나 법정 드라마가 아니라 거대한 공론장이다. 우리는 비상계엄 사태에 관해 더 많이 이야기하고 더 깊이 정리해야 한다.
하승우 이후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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