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 김진명리학회 회장·시인·철학자
우리 시대가 겪는 불안의 근원은 '세계관의 충돌'에서 비롯된다. 한쪽은 데카르트가 상징하는 이성적이고 완벽하게 작동하는 우주의 청사진이다. 다른 한쪽은 양자역학이 보여주는 우주가 있다. 즉 원천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무작위성이라는 주사위가 있다. 우리는 이러한 양극단 사이에서 좌표를 찾지 못하고 방황한다.
첫 번째, 시계공의 신: '예측 가능성'이라는 안락한 감옥.
17세기, 아이작 뉴턴과 르네 데카르트를 비롯한 근대 철학자들에게 우주는 '시계공의 신(God the Watchmaker)'이 만든 거대한 시계였다. 신은 최초에 태엽을 감아 우주라는 시계를 완벽하게 설계했다. 이후의 모든 사건은 인과율(Causality)이라는 정밀한 톱니바퀴에 의해 오차 없이 작동했다. 이 세계관에서 필연(必然)은 절대적인 미덕이며 질서였다.
우리 삶도 거대한 기계의 작은 일부였다. 만약 현재의 모든 변수(속도, 위치, 질량 등)를 정확히 안다면, 미래는 예측 가능하다고 믿었다. 이것이 바로 라플라스가 꿈꾼 '라플라스의 악마'였다. 이 세계관은 우리에게 지적 만족감과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했다. 세상에 무작위란 없으며, 모든 것은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발생한다. 우리가 겪는 불행은 원인을 찾지 못했을 뿐이라고 했다. 운명은 정교하게 짜인 설계도였고, 우리는 설계도를 해석하고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듯했다. 이것은 불안을 제거하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강력한 철학적 안심처였다.
두 번째, 무작위의 주사위: 근원적 불확실성의 침공.
20세기에 접어들며, 완벽한 시계는 기초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바로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의 등장 때문이었다. 미시 세계, 즉 원자보다 작은 입자의 세계에서 물리학자들은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했다.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고 아인슈타인이 외쳤으나 현실은 달랐다. 양자 세계는 본질적으로 무작위(Randomness)였다. 특정 입자가 A 지점에 있을지 B 지점에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오직 확률만 존재했다. 더 심각한 것은, 관찰하는 행위 자체가 입자의 상태를 결정해버린다는 관찰자 효과(Observer Effect)였다. 완벽한 인과율 대신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즉 '근원적 우연(Contingency)'의 세계가 드러난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물리학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세계관 자체를 강타했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는 철학적 믿음이 무너졌다. 만약 우주의 기초가 예측 불가능한 무작위라면, 우리가 겪는 고통과 불행도 마찬가지다. 어떤 목적이나 설계 없이 그저 '발생했을' 뿐일 수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 필연과 우연 사이, 근원적 불안.
우리는 시계공의 신이 약속했던 '필연적 질서'에 익숙해진 존재이다. 그래서 모든 사건의 배후에서 숨겨진 의미나 인과 관계를 필사적으로 찾으려 한다. 직장에서의 실패,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예상치 못한 사고 등이 '운명적으로' 혹은 '나의 실수'로 인해 발생한 필연적인 결과로 믿고 싶어 한다. 그래야만 다음 행동을 정하고 어떻게 책임져야 할지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양자역학적 주사위가 던져진 '우연적 현실'에 살고 있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어떤 설명할 수 없는 '확률'로 인해 일이 엇갈리는 경험을 한다. 노력과 상관없이 찾아오는 불운, 성실함과 무관하게 터지는 행운. 이것이 현대인의 근본적 불안을 만든다.
우리의 영혼은 규칙을 원한다. 현실은 무작위성을 증언한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고 절규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냥 그렇게 되었다(Just happened)"는 냉담한 침묵일지도 모른다.
네 번째, 불안을 끌어안는 '운명애'의 재해석.
이러한 대립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니체의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애)'를 새로운 시선으로 해석해야 한다. 전통적인 운명애는 시계공의 신이 만든 '필연적 설계'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용기였다. 현대의 운명애는 '무작위의 주사위'가 던져 만든 결과를 받아들이는 주체적 결단이어야 한다. 즉, 삶이 완벽한 설계도였든, 아니면 우연의 연속이었든, 최종적인 '결과물(나의 현재)'을 나의 것으로 인정하고 끌어안는 힘이다. 사건의 원인을 통제할 수 없지만, 그 사건을 대하는 태도와 의미 부여는 온전히 우리의 몫이다.
시계공의 신은 침묵하고, 무작위의 주사위는 지금도 굴러간다. 불안은 두 세계관의 간극에서 생겨난 숙명적인 그림자다. 불안을 제거할 수는 없다. 우연에서 필연적인 의미를 창조해내는 것이다. 이것이 운명이라는 난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고결한 방식이다. 김진 김진명리학회 회장·시인·철학자
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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