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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풍향계/ 시민 불복종과 도덕적 정당성

멕시코-미국 전쟁(Mexican–American War)은 ‘북미대륙 전체가 미국 정착민들을 위해 펼쳐진 것’이라는 인간의 본질적 양심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이론 즉,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을 앞세운 미국의 승리로 돌아갔다.

풍향계/ 시민 불복종과 도덕적 정당성

▲ 한희송 ESI 교장

멕시코-미국 전쟁(Mexican–American War)은 ‘북미대륙 전체가 미국 정착민들을 위해 펼쳐진 것’이라는 인간의 본질적 양심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이론 즉,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을 앞세운 미국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결과는 1848년 5월 양국이 교환한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Treaty of Guadalupe Hidalgo)’으로 확정됐다.

이로써 현재 텍사스, 콜로라도, 애리조나, 뉴멕시코, 와이오밍, 캘리포니아, 네바다, 유타 등 여덟개의 주가 차지하고 있는 멕시코 땅은 미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그로부터 80여일 후인 동년(同年) 8월 19일 뉴욕헤럴드(New York Herald)지는 서부해안지역인 캘리포니아에서 대량의 금이 발견됐다는 뉴스를 터트렸다.

‘49년도 사람들(Forty-niners)’라는 명문 미식축구팀이 있다. 뉴욕헤럴드의 기사로 인해 금을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1849년 1년 동안 쇄도(殺到)하여 만들어진 곳이 지금의 샌프란시스코이니 ‘49년도 사람들’이란 이름으로 미식축구의 한 프랜차이즈 도시가 될 만한 터이다.

이즈음 미 대륙에서 최초의 철학이 움트고 있었다.

<월든(Walden; or, Life in the Woods)>이란 책으로 세계인들에게 익숙한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스승인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의 초월주의(超越主義/transcendentalism)에 일찌감치 매료됐다.

미국의 정치가 ‘다수결’의 힘에 기대 다른 나라로 부터 땅을 빼앗고, 경제적 가치의 기준인 금을 채취하기 위해 자연의 마음대로 취(取)하는 행위는 ‘정의(正義)’의 기준에서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진리는 자연이나 인간의 구분으로 도출되지 않는 초월적 지위를 가지므로 인간의 권력과 돈에 대한 욕구 같은 개념이 인간이나 자연의 존재를 정의할 수 없다.

그는 미국의 ‘개척자 정신’이 다른 사람이나 자연을 훼손한다면 이는 본질적 ‘선(善)’에 대한 도전일 뿐 철학적 가치를 향유(享有)하지는 못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사람들에게 양심과 존재의 가치를 고민하게 했다.

그러나 그 규모는 다수파의 확장주의에 대항할 수 없는 수준에 불과했고 자신들의 생각을 드러내는 일에 공포 혹은 어려움을 겪는 일부에 불과했다. 소로는 정부에 세금을 납부하지 않으므로 자신의 양심을 행동으로 표현했고 그 대가로 하룻밤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예수는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남을 마무리 하며 그들을 각 방면으로 보내면서 “오직 복음이외에는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는 당부를 한다. 마테오 복음서에 기록된 이 구절에 감명받아 평생 ‘무소유’를 실천하며 가난한 자들의 보호 성인으로 살았던 아씨지의 프란체스코(Francis of Assisi)는 자신의 이름이 멕시코를 힘으로 누르고, 거기에서 발견된 ‘금(gold)’을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모인 도시의 이름이 되는 것에 하늘에서나마 달가웠을까?

개인의 도덕적 정당성이 ‘다수파’에 우선한다고 주장한 소로는 <시민정부에 대한 저항(Resistance to Civil Government)>이란 수필을 샌프란시스코에서 골드러쉬(Gold Rush)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1849년에 출판했다. 여기에서 그는 ‘시민 불복종(Civil Disobedience)’이란 개념과 그 용어를 설파(說破)한다.

아무리 ‘소수(少數)’라 해도 그들이 도덕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면 ‘다수’보다 우위에 있다. 이로부터 ‘한 사람으로서의 다수(majority of one)’라는 용어가 강력한 의미를 가지게 됐다.

양심있는 소수들이여 왜 저항하지 않는가? 왜 도덕이나 정당성 같은 용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다수’에 복종하는가?

인간과 자연의 존재가치는 형식적 제도로 도덕적 정당성을 얻지 못한다.

이러한 생각이 가장 필요한 분야가 바로 ‘교육’이다.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시가 뉴욕헤럴드에 발표된 오늘 ‘개인으로서의 다수’가 될 용기로 일어나서 아이들을 물질적 사회에 굴복시키는 시스템에서 ‘도덕적 정당성’을 추구하는 체계로 가야 한다고 외치는 어른들이 있다면 우리 모두는 얼마나 행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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